한국인은 생존주의자이다.

-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김홍중)를 읽고

by 사각사각

* 본 서평은 이음출판사 서포터즈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살아남았다.", 생존이 삶의 가장 큰 목적이 된 세상은 마치 평화로운 일상과 동떨어진 세계를 그릴 수밖에 만든다. 『눈물을 마시는 새』(이영도)의 제사에서 나오듯이("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 한 남자가 사막을 걷고 있었다."), 우리는 쓸쓸하고 황량한 세계를 상상할지도 모른다. 혹은 피와 살점이 낭자하는 폭력의 전쟁터를 상상할지도 모른다.

지금 설명하는 이야기는 전술한 두 가지 사례가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있음에 생존이라는 단어가 지배하고 있다.『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의 저자 김홍중 교수는 20~21세기 근대 한국인은 "생존주의자"라며 한국을 비평·분석한다.


나는 이렇게 본다. 한국 근대의 고유한 사상 형태는 하이데거적 '존재'론도 아니고 사르트르적 ‘실존’주의도 아니다. 한국 근대의 간판 사상은 '생존'의 사상이다. 한국인들의 뇌리를 떠난 적 없는 강력한 질문, 영원히 회귀하면서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을, 죽음의 방식을, 존재와 체험의 틀을 만들어간 그 서글프고, 야비하고, 모질고, 집요하고, 잔인한 질문. 살아남는다는 것, 생존한다는 것. - 8p

저자는 한국의 근대성이 서구의 근대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기원을 갖는다고 진단한다. 서구의 근대가 계몽과 이성에 기반한 ‘진보의 꿈’을 꾸었다면, 한국의 근대는 식민지배와 전쟁이라는 거대한 파국을 겪어내며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생존의 꿈’으로 형성되었다.

유럽의 근대는 진보의 꿈, 발전의 꿈, 문명화의 꿈으로 특징지어지는 반면에 한국 근대의 지배적 꿈은 유럽 근대가 폭력적으로 부과한 파국적 생존위기를 벗어나는 것, 한마디로 말해서 생존의 꿈이었다. -66p

구한말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한 국권 상실의 위기, 전 국토를 초토화한 한국전쟁, 그리고 IMF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체험. 20세기 한국인에게 삶은 고상한 실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사느냐 죽느냐, 이 이분법적 공포 속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기에 근대 한국인들은 세상을 약육강식의 정글로 파악하고 힘을 길러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그런 독특한 마음의 습관, 즉 ‘생존주의’는 한국인의 내면에 깊이 각인되었다.

이처럼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깊숙이 박힌 생존주의의 징후는 한국의 문화 예술 작품 곳곳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이러한 생존주의의 모습을 포착하여 비평한다.

박수근(左)과 박완서(友)의 작품

전쟁의 폐허 속에서 잎을 다 떨군 채 봄을 기다리며 묵묵히 견디는 박수근의 그림과 박완서의 소설에서 한국적 생존의 원형을 발견한다. 또한 김기영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기괴한 인물들을 통해 도덕이나 윤리 이전에 작동하는 맹목적인 생존기계의 욕망을 읽어낸다. 나아가 최근 세계적인 인기를 끈 〈오징어 게임〉이나 〈기생충〉 같은 작품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생존이 게임으로 변질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존주의자의 면모는 비단 평범한 소시민만의 것이 아니었다. 한국 근대를 이끈 주요 인물들 또한 이 거대한 생존의 욕망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박정희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비상상황에서 힘을 길러 안보와 성장을 도모한 생존주의적 통치성의 설계자였다. 한편, 정주영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무한한 발전을 현실화한 생존주의적 자본가의 화신이었다.


생존주의의 관점하에, 저자가 포착한 한국 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바로 '생존주의의 역설'이다. 20세기 동안, 한국인들은 전쟁과 가난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국가와 국민 모두가. 그 처절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 하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정작 현재의 한국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차 위협받는 곳이 되어버렸다. 20세기의 팽배했던 파국(전쟁과 가난)의 위협들로부터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주의의 성공이 만들어낸 현(現) 사회를 수많은 한국인들은, 인간다운 생존이 지극히 어렵고 심지어는 불가능한 사회로 인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생존주의가 오히려 생존을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생존주의가 생명이 아닌 죽음을 생산하고 있다. 이것이 생존주의의 비극적 역설이다. -91p

이러한 역설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각자도생의 정글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현대인은 끊임없이 스펙을 쌓고 자기를 관리하며 스스로를 ‘생존주의자’로 주체화한다. 그러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은 역설적으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다른 가능성들을 스스로 거세하게 만든다. 생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꿈을 유예하고,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단절하며, 오직 효율성만을 쫓는 과정에서 정작 삶의 본질적인 생명력은 고갈되어 간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내면이 피폐해지는 ‘자기 착취’의 굴레, 이것이 저자가 진단하는 현대 한국인의 초상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는 대안적 삶에 대한 꿈을 자발적으로 제한한다. 너무나 도덕적인 동시에 너무나 비윤리적인 이 삶은 생존의 극한적 추구 속에서 역설적으로 생명력의 소진을 향해 간다. - 219p


여기서 생존을 다시 한번 짚고 가자. 대체 생존이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생존은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상태가 아니다. ‘-에서 살아남는다’는 말은 '주체가 혼자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저해하거나 방해하는 어떤 대상을 뚫고 나가는 것, 그렇게 생존함'(23p)을 시사한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혹은 전쟁의 생환자들이 증언하듯, 극한의 비상상황에서 나의 생존은 종종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타자의 희생으로부터 나의 지금은 내게 주어질 수 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 죽어야 했다면, 나의 ‘존재’는 그의 ‘소멸’과 교환된 것이다. 이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살아남았음’을 자랑스러워할 수 없다. 우리는 부끄러움에 휩싸여 자신의 생명을, 실존을, 존재를, 생존을 심문하기 시작한다. - 27p

그렇다면 이토록 처절하고 비윤리적인 생존 경쟁의 끝에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저자는 지난 세기를 지배했던, '코나투스(Conatus)’의 논리를 멈춰 세운다. 코나투스는 자신의 힘을 키우고 영역을 확장하여 살아남으려 하는 무한한 성장과 자기 확장을 추구했다.

이러한 코나투스의 시대는 끝났다. 인류세라는 전 지구적 위기를 목도했음에도 인류가 여전히 자신의 힘(코나투스)을 계속하려 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바로 생존의 실패, 공멸뿐이다.


여기서 저자가 제시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생존 원리는 역설적이게도 힘을 빼고 자기를 비우는 '케노시스(Kenosis)', 즉 ‘자기-비움’이다.

생존하기 위해서 존재의 축소를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존재의 강화(코나투스)가 생존을 불가능하게 하며 오히려 존재의 삭감(케노시스)이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 - 337p

케노시스란 본래 기독교 신학에서 신이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신성(神性)을 비워낸 '자기-비움' 혹은 창조를 위해 신이 스스로를 침줌(Zimzum, 축소)한 사건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신학적 개념을 인류세의 생존 윤리로 과감하게 확장한다.

기후 위기와 공멸의 위기 앞에 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반대의 방향, 즉 스스로의 힘을 빼고 존재를 삭감하는 방향이다. 인간의 케노시스, 인간성의 케노시스를 향해. 가이아와 마주하며.

인간 문명이 스스로를 비우고, 스스로를 제한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스스로를 감축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신이 신성을 비우고 십자가를 졌다면, 인류세의 인간은 인간성을 비우고 가이아로 내려가야 한다. 인간의 케노시스, 인간성의 케노시스다. -345p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는 "우리는 생존주의자이다"라고 말한다. 이 생존주의에 대한 화두로 시작하여 20세기를 분석한다. 그리고 21세기 한국 모습과 인류세에 대하여 어떻게 생존주의를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지 제안한다. 오늘날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고 힘을 빼는 것. 생존을 위해 타자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워 타자와 연결되는 것. "살아야 한다"라는 문장은 우리 주변을 여전히 떠돌고 있다. 우리는 이를 인식하고 새롭게 바꿔야 한다.


이러한 사유를 담아낸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몹시 훌륭했다. 저자는 들뢰즈의 언어를 사용하여 한국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인물들을 심도 있게 비평한다. 각 장의 내용들은 독립적인 완결성을 지니면서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때로는 비선형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거대한 흐름을 형성한다. 서평을 쓰기 위해 거시적인 흐름 위주로 짚어보았으나, 사실 이 책이 보여주는 비평의 세세한 결들은 읽을수록 감탄할 만한 통찰로 가득하다. 정독을 권한다.


이 책의 저자 김홍중 교수님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

지은이: 김홍중

출판사: 이음


한줄평: 20~21세기 한국을 통찰하는, 잔혹한 생존의 테제

별점: ★★★★★ (5.0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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