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독일 레버쿠젠에서 토트넘으로 이적한 손흥민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의 대표 축구선수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는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갔다. 그러나 그 여정이 늘 화려하고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팀은 흔들렸고, 우승 트로피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흥민은 동료 해리 케인과 함께 결정적인 순간마다 팀을 살려냈다. 잘하지 못해 보이는 경기에서도, 내용이 답답한 날에도 결국 결과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그것을 ‘꾸역꾸역 이기는 축구’라 불렀다.
이 ‘꾸역꾸역’이라는 말은 묘하게도 우리의 민주주의와 닮아 있다. 민주주의는 단 한 번도 시원하게 모든 것을 해결해준 적이 없다. 정치도, 사회도 늘 미완이다. 하나의 문제가 잠잠해지면 또 다른 이슈가 고개를 들고, 국민들은 다시 판단하고 견뎌야 한다. 깨끗하게 정리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결론으로 끝난 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그렇게 흘러왔다. 아니, 그렇게 버텨왔다.
12·3 비상계엄 사태 역시 다르지 않다. 과정은 혼란스러웠고, 판단은 갈렸으며, 결과를 둘러싼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쩌면 국민 정서와는 어긋난 선고가 나올 수도 있다. 우리가 직접 뽑은 대통령이었고, 그 선택의 책임 또한 국민이 함께 감당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 앞에서도 사람들은 참고 살아간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잔인한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끝내 선을 넘지는 않는다. 1~2월로 예정된 선고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민들은 보고 있고, 기억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속도가 아니라 시선으로 작동한다. 느리고 답답해 보여도, 결국은 감시받는 권력과 기록되는 역사가 남는다. 그 과정이 ‘꾸역꾸역’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단 한 번도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뚫려 달려간 적이 없다. 경기는 좋았다가 나빠지고,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그래도 사람들은 하루를 포기하지 않는다. 손흥민이 수없이 막히는 수비 앞에서도 골을 넣기 위해 끊임없이 공을 몰고, 다시 슈팅 각도를 만들었듯이 말이다. 성공한 장면보다 실패한 장면이 훨씬 많았을 그 시간들이 결국 득점왕을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꾸역꾸역 살아간다. 대단한 해법이 없어도, 시원한 결론이 없어도, 그냥 해야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정치도, 사회도, 개인의 삶도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간다. 포기하지 않고 공을 다시 차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전진이다. 결국 잘될 것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단순하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꾸역꾸역 가다 보면 어느 순간 골대는 다시 눈앞에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