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빨치산'

by JIPPIL HAN

우리 엄마는 뇌출혈로 쓰러졌던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서 결국 살려냈다.

돌아가실 것이라고 예상했던 병원에서도 살아나신 건 며느리 덕분이라며, 할머니한테 "며느리한테 정말 잘하셔야 되요"라고 할 정도였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엄마는 동네에서 '효부 며느리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 상은 엄마에게 족쇄였고 그때부터 엄마의 시집살이는 더 깊은 고난의 길로 들어섰다.

할머니는 후유증으로 신경안정제를 매일 드셔야 할 만큼 불안감을 보이셨고, '젖먹이가 엄마를 찾듯' 며느리를 시도 때도 없이 찾아댔다.

어릴 적 할머니가 했던 말 중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니 어미 어디 갔냐? "였다.

엄마는 몇 달에 한번씩 있던 유일한 외출인 대학 동창 모임도 나가지 못할 만큼 할머니의 속박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포동에 살았던 우리 집 뒤쪽으로 '대모산'이라는 산이 있었다.

280m 정도 되는 높이로, 정상을 찍는데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산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산에 다녀오겠다고 나가셨다.

" 갑자기 무슨 산?" 하고 물었지만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엄마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등산이 처음이었던 엄마는 처음에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거의 쓰러질 듯 힘들어하며 집에 돌아왔다.

그 사이에 할머니는 엄마를 계속 찾아댔고 집에 돌아온 엄마에게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난 엄마가 그날로 등산을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러나 엄마는 식구들 아침식사를 모두 해결하고 나면 그 길로 매일 아침 산으로 향했다.

엄마는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등산을 선택한 것이다.


할머니는 매일 등산을 가는 엄마의 뒤통수에 대고 싫은 소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해댔고, 엄마는 싫은 소리를 조금이라도 덜 듣기 위해 등산과 하산의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2시간 반이던 시간이 점점 줄더니 마침내 1시간까지 단축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나는 엄마가 등산을 어떻게 하는지 너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엄마 나도 따라가면 안 돼? " 하고 물어봤다.

엄마는 "너는 절대 엄마 못 따라와 그냥 집에 있어." 라며 한사코 나를 떼어내려 했지만 나는 기어코 엄마를 따라 등산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언제 사귀었는지 등산하는 다른 분들과 지나치면서 계속 인사를 했다.

지나는 길에 어떤 아저씨가 나보고 이렇게 얘기하셨다.

"엄마랑 등산하려고 왔어? 너 못할걸.. 너네 엄마 이 산에서 아주 유명해~ 별명이 빨치산이야. 하하"

결국 나는 엄마와 등산을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산을 거의 뛰다시피 올라갔다가 정상을 찍고 뛰어내려오는 말도 안 되는 등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위험하고 무릎에 굉장한 무리가 가는 행동이다.

그렇지만 엄마에게 너무 소중한 엄마만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그때 마침 찾아온 갱년기와 시집살이를 등산으로 이겨내려고 치열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그때 엄마 나이와 같은 나이가 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엄마가 너무 안쓰러워 눈물이 난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엄마 편이 하나도 없던 그 시절, 그 외로움과 설움을 대모산 정상에서 쏟아내고 또다시 시월드로 복귀했을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이제 84세가 된 우리 엄마.. 이제 무릎이 아파서 거동도 불편해지신 지금, 마치 추억처럼 얘기하신다.. "그때 엄마 별명이 빨치산이었어~ "








작가의 이전글오늘 딸아이의 새 가발을 찾으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