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선이와 나는 매달 25일만 되면 학교 앞 서점으로 달려갔다.
한 푼 두 푼 모은 용돈을 손에 꼭 쥔 채, 새로 나온 잡지를 사기 위해서였다.
“이번 달 <하이틴> 표지모델은 누구지?”
예쁜 하이틴 스타가 환하게 웃고 있는 따끈따끈한 새 잡지를 손에 드는 순간, 풍기는 새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여느 향수냄새보다 좋았다.
이번 달 지선이와 나는 고민에 빠져있다.
'이상은' 대형 브로마이드가 부록인 <주니어>를 살까?
아니면 메인 기사가 '이상은' 특집인 <하이틴>을 살까?
장국영 브로마이드가 실린 <스크린>도 사고 싶고 <로드쇼>에 실린 ‘컬트영화 걸작선’도 궁금하다.
돈은 한정되어 있는데 사고 싶은 잡지는 네 권이나 된다.
돈이 없는 우리는 결국 서점 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언니~ <주니어>에다가 <하이틴> 부록 하나만 껴주시면 안 돼요?” 철없는 떼를 써보기도 했다.
인터넷이 없던 그 시절, 잡지는 TV와 라디오 외에 유행과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창구였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의 최신 소식과 다양한 사진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고 최신 패션을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잡지 한 권을 사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요물' 그 자체였다.
스타의 사진과 브로마이드는 내 방을 장식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였고,
잡지를 오려 하드보드지 상자에 붙여 만들던 '필통'은 그 당시 나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또한 잡지에 있는 패션 화보는 그대로 '나의 쇼핑 리스트'가 되었다.
잡지에 나온 패션모델 화보를 찢어 들고 ‘고속터미널 지하상가’ 몇 바퀴를 돌며 비슷한 옷을 찾아내 입어보곤 했다.
“엄마, 이 청바지 사면 안 돼? 잡지에 나온 거랑 똑같단 말이야”
엄마는 ‘옷이 같으면 뭐 하니, 모델이 다른데…’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 사주셨다.
그 바지를 입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야, 너 바지 뭐야? 완전 패션리더네~” 하며 부러워했다.
그 날 만큼은 내가 교실의 트렌드세터였다.
잡지 뒤쪽의 ‘연애 상담 코너’도 빼놓을 수 없었다.
“같은 반 남자애가 자꾸 저한테 장난을 쳐요. 저를 좋아하는 걸까요?”라는 상담 글.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유치한 상담이지만, 그때는 그 글만 읽고도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 10가지 방법’
‘첫 데이트에서 하면 안 되는 말 5가지’
남자친구도 없으면서 저런 코너들을 왜 그렇게 열심히 읽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난다.
잡지의 마지막 장에는 ‘편집부 앞으로 사연을 보내세요’ 코너가 있었다.
잡지에 붙어있는 엽서를 잘라내어
“편집부 언니, 이번 주에 저희 학교 소풍 가요…”라며 사연을 보냈다.
다음 달 25일, 잡지에 내 이름이 실린 것을 발견한 순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되어
잡지를 들고 학교로 달려가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그날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세상에 내 이름을 남긴 순간’으로 일기장에 기록됐다.
그 시절 잡지는 한 달을 기다리게 만드는 나의 달력이자, 내가 좋아하는 스타와의 뜨거운 만남의 장,
패션 교과서이자 연애 백과사전, 그리고 나만의 일기장이었다.
나는 25일 잡지가 나오는 날만 기다리며 다음 달에는 무슨 기사가 날까 기대에 부풀었고, 잡지를 보며 패션과 문화를 익혔으며 그와 함께 성장했다.
이제는 달마다 잡지를 사러 서점에 달려갈 일은 없겠지만, 여전히 잡지의 새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그립다.
모든 것을 인터넷상에서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볼 수 있는 지금이지만, 빳빳한 종이 한 장 한 장을 천천히 넘겨가면서 다음 장에는 뭐가 나올지 기대하며 궁금해했던 그때의 설렘이 너무 그립다.
가끔 대형서점 잡지코너에서 일부러 잡지를 들어 냄새를 맡아보곤 한다.
그런 나를 누가 본다면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훗
그 냄새를 맡으면 다시 열여섯 살 여름, <하이틴>을 펼쳐 친구와 얼굴을 파묻고 보던 그때의 추억 속으로 돌아가게 된다.
- 다음 회에 최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