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청년 누아르」 ①
봄에는 여기저기를 떠돌며 예행연습을 했다. 전국에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축제가 열렸다. 벚꽃축제를 비롯한 산수유, 매화 등 각종 꽃 축제와 딸기, 미나리, 미더덕, 멸치 등 지역 특산품을 내세운 축제, 꽃신축제, 마임축제, 공예축제 등등 연발하는 폭죽처럼 수많은 축제가 잇따라 열렸다. 우리는 지역 축제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아직 명함을 사용하진 않았다. 사진관과 술집에서처럼 가벼운 거짓말을 몸에 익히는 기간이었다. 축제를 구경하다 보면 점포를 운영하는 상인들이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그들의 호객행위에 여러 신분으로 호응했다. 딸기 찹쌀떡을 먹는 은행원이기도 했고 미나리 비빔밥을 먹는 기자이기도 했다. 명함이 필요 없는 대학생 신분으로 야외 테이블을 차지하고서 하릴없이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 이 기간에는 사람들과 깊게 엮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따금 대포 같은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들고 지역 축제를 전전하는 사진사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N은 축제마다 반복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잘 기억했다. 그들이 눈에 띄면 우리는 은근슬쩍 피해 다녔는데, 나는 괜스레 피하게 되는 것이었고 N은 당연히 피해야 한다는 눈치였다.
오월 말부터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매번 적절한 준비기간을 가진 뒤 일박이일을 여행하는 패턴이었다. 여행이 끝나면 사나흘 정도 각자 자유시간을 가졌다. 보름의 준비기간을 가졌던 첫 번째 여행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어설펐고 불안했고 잔뜩 긴장했음에도 태연한 척 노력했다. 짧은 대화만 나눴던 예행연습과는 전혀 달랐다. 첫 여행이 끝나자마자 나는 탈진했고 잘하지 못한 것 같아 낙담했다. N은 내 속도 모르고 마냥 신난 채로 나흘 동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기간은 열흘이었다. 두 번째 여행은 꽤 안정적으로 마쳤다.
세 번째 여행은 준비기간이 일주일로 줄었다. 여행지의 한 술집에서 우리보다 네 살 많은 전직 배구선수를 만났다. 시원시원하고 호쾌한 성격 탓에 우리와 금방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그저 그런 선수생활을 마치고 고등학교 배구팀 코치로 일하는 그는 아직 선수로서의 자부심이 더 커 보였다. 재승은 배구선수가 코치직을 때려치우려는 사정을 차분하게 잘 들어줬고, 그 자신도 외제차 딜러 일을 하고 있으나 사람을 대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배구선수는 그 이야기에 현역 시절의 불화와 현재 운영진 내부에서의 갈등을 이야기하며 어딜 가나 사람과의 문제가 화근이었다고 회상했다.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내내 별일 아닌 듯 가볍게 말하던 배구선수가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는 민망한지 밝은 어조로 차를 바꿀 때가 됐다며 재승에게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했다. 그간 먼저 명함을 달라고 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외제차 딜러인 재승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줬다. 진짜 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좀 전에 들은 이야기로 짐작컨대 차를 바꿀 돈은 없어보였다.
“현근씨는 사진관을 운영하는 거야?”
배구선수가 재승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으며 내게 물었다.
“아뇨. 프리랜서라 스튜디오가 필요하면 그때그때 빌리는 편이에요.”
현근은 해외에서 주로 작업하며 상업사진보다는 예술사진 기획을 고집하는 친구다. 그러나 이런 정보까지 먼저 깔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렇구나. 자영업하나 싶어서 물어봤어. 다 때려치우고 한적한 데서 가게나 열까 봐.”
“형, 그게 제 꿈이에요.” 재승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세상 모든 걸 다 구할 수 있는 잡화상점을 열고 싶었거든요. 손님이 원하는 게 있다면 어디서든 꼭 구해오는 잡화상점 사장, 멋있지 않아요?”
배구선수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재승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재승씨는 사람이 참 순수한 것 같아. 눈만 봐도 사람이 선한 게 느껴져.”
“형님도 그러신 것 같은데요.” 내가 끼어들었다. “의외로 카페 같은 걸 차리셔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카페 좋지. 난 카페나 펍 같은 걸 해 보고 싶어.”
“멋지네요.” 재승이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커피도 팔고 술도 팔고 미나리도 팔고 사다리도 파는 거예요, 어때요?”
배구선수와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배구선수가 가게를 차리면 연락할 테니 꼭 들르라고 했다. 우리는 기분 좋게 소주잔을 맞부딪쳤다. 나는 슬쩍 N을 쳐다봤다. 여기가 연극무대고 우리가 배우였다면 상대 배우가 연기를 잘할수록 나 역시 극에 몰입했겠지만 여행에서는 아니었다. N이 연기를 잘하면 잘할수록 나는 극에서 튕겨나가 관객처럼 상황을 바라보고는 했다. 한 남자가 화장실로 향하다 앉아 있던 나랑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그가 사과했다.
나는 뒤돌아 괜찮다고 했다. 그가 지나간 뒤 돌연 재승의 얼굴이 사색이 된 채 굳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N이 짰던 재승의 인물 설정을 떠올렸다. 극중 나올 만한 사전 설정인지 N의 애드리브인지 아니면 다른 불상사가 생긴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는 태연한 척 배구선수와 재승, 그리고 내 소주잔을 차례로 채웠다.
“재승씨, 무슨 일 있어?” 배구선수가 말했다.
재승은 몸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다리를 떨고 있었다. 빳빳이 굳은 그의 고개를 보며 녀석이 의도적으로 가게 한쪽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가 외면한 쪽을 돌아봤다. 방금 화장실에 간 남자의 테이블이었다. 일행이 세 명 더 있었다.
“아는 사람이었어?” 나는 화장실을 눈짓하며 물었다.
“아니. 그 사람 말고…….”
“그럼? 저 테이블에 있어?” 배구선수도 그쪽 테이블을 쳐다보더니 끼어들었다.
재승이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그러다 혼란스러운 듯 다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아닐 수도 있어요.”
“왜 그래? 괜찮아. 말해 봐.”
배구선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재승은 한참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릴 때 절 죽어라 괴롭혔던 녀석이 있었어요. 모르겠어요. 똑같이 생기긴 했는데…… 걔 때문에…… 걔 때문에 병원에 몇 달을 있었는데…….”
배구선수가 한손으로 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리더니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누군데? 저기 염색한 놈? 아니면, 모자 쓴 애?”
재승이 염색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 아는 앤데? 동창이야?”
“네. 초등학교 때.”
“무슨 초등학교?”
“네?”
“학교 이름이 뭔데?”
재승이 학교 이름을 댔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래, 알았어.”
배구선수가 약간 비틀대며 일어나 그쪽 테이블로 갔다. 그는 염색머리와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우리에게 뒷문을 가리켰다.
“뭐라는 거야?” 내가 물었다. 재승은 대답이 없었다.
배구선수가 갑자기 염색머리의 멱살을 잡아챘다. 의자가 나동그라졌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배구선수가 놈을 가게 밖으로 끌고 나가더니 인정사정없이 뺨을 후려쳤다. 종업원과 염색머리의 동료들이 서둘러 나갔지만 거구의 배구선수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발만 굴렸다. 내가 말리러 가려는데 재승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왜? 가서 말려야지.” 내가 말했다.
재승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더니 테이블에 현찰 몇 장을 두고 일어났다. 그는 내 팔을 잡고 뒷문으로 나갔다.
“괜찮은 거야?” 내가 물었다.
“응.” N이 약간 붕 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괜찮아.”
“너 말고, 미친놈아. 일이 너무 커졌잖아.”
N은 웬일인지 대답할 정신도 없어 보였다. 그는 흐트러진 호흡을 반복하며 검지를 깨물었다. 순간 녀석이 정말 두려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구선수가 골목을 돌아 달려왔다. 얼굴이 들떠 있었다.
“재승 씨, 그 새끼 맞아. 봤지? 맥도 못 추리는 거.”
“네.”
“좀 괜찮아?”
“덕분에요. 고마워요, 형. 근데 괜히 형이 곤란해지시는 거 아니에요?”
그때 재승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가 골목 안쪽에 들어가 통화하는 동안 나는 배구선수에게 아까 염색머리와 무슨 얘길 했냐고 물었다.
“‘××초등학교?’하고 물으니까 그렇대. 그래서 박재승 아냐고 물었지. 모른대. 그래서 바로 갈겼지.”
“뭐라고요?”
“괘씸하잖아. 왼손으로 쳤어. 안 죽어.”
미치겠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돌아섰다. 재승은 아직 통화 중이었다. 큰길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배구선수와 눈을 맞췄다. 그는 당황해하더니 이따가 자기 집 근처에서 한잔하자며 동네를 알려주고 서둘러 토꼈다. 사이렌 소리는 근처에 오지 않고 멀어져갔다. 나는 배구선수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N에게로 갔다.
“형은?” 통화를 끝낸 N이 물었다.
“튀었어. 자기 집 근처에서 한잔 더 하자고 주소 알려주던데.”
“어딘데?”
“까먹었어.”
“그래?” 그는 여전히 정신이 덜 돌아온 눈치였다. “죄송하네.”
“오늘은 일단 들어가자.”
우리는 택시를 잡아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이 모든 게 거짓이라는 걸 배구선수가 알아채면 맞아죽을지도 몰랐다. 왠지 웃음이 났다. 차창 밖으로 불 켜진 상가와 술집들이 천천히 지나갔다. 한바탕 소동에 휘말렸다가 돌아왔을 때의 묘한 흥분이 여운을 남기며 안도감에 휩싸였다.
“정말 위험할 뻔했어.” 나는 후련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웬 사과야.”
정적이 흘렀다. 택시기사가 차선 변경을 위해 깜빡이를 켰다. 딸깍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는 와중에 침묵이 불편하게 찝찝함을 남겼다. N을 돌아봤다. 그는 침울하게 가라앉은 채 생각이 많아 보였다.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애드리브하려면 미리 눈치라도 줘. 재미는 있었는데 놀랐잖아.” 내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애드리브라니?”
N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를 잠시 보고만 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이었어? 염색머리가 너 괴롭혔다는 거.”
순간 N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죄책감이 들 정도로 상처받은 얼굴이었고, 곧 그걸 감추려는 듯 애써 미소 지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러니까 그 표정은, N이 골백번도 더 연습한 재승의 표정이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차선을 변경한 택시가 깜빡이를 끄고 부드럽게 속도를 높였다. 나는 얼떨떨했다. 옆에 앉아 있는 녀석이 N인지 재승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무릎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를 몰고 가는 속도를 최대한 느끼며 머리를 비웠다. 아무렴 어떤가. 그날 나는 여러모로 이 여행의 무서운 위력과 위험한 매혹을 느꼈다.
여행 횟수가 늘어나면서 N은 점점 과감한 재미를 추구했다. 그가 미술관 큐레이터 서동준을, 내가 펍 <올 나이트> 사장 이영민을 연기하던 때였다. 우리는 계곡을 낀 자연휴양림에 텐트를 쳤다. 휴양객들과 각양각색의 텐트로 북새통이었다. 웃통을 깐 젊은 남자들과 얇은 남방을 걸친 여자들, 튜브를 낀 어린애들이 계곡에서 여름을 만끽했다. 우리의 새 배역은 고교 동창들끼리 낚시동호회를 꾸릴 정도로 낚시 애호가들이었다. 우리는 산 아래 강변에 낚시 장소를 잡았다. 흙과 자갈 사이에 홀더를 두들겨 박고 낚싯대를 걸쳐두었다. 나는 낚싯대 끝에 방울을 단 뒤 캠핑의자에 앉아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훑었다. 위스키를 끼고 사는 필립 말로를 보며 내가 펍 사장이라면 어떤 술을 구비해 놓을지 생각했다.
낚시를 시작한 지 한두 시간도 안 되어 우리는 쏘가리 세 마리와 꺽지 두 마리, 그리고 이름 모를 물고기 두 마리를 잡았다.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N과 낚시를 몇 번 해 봤지만 둘 다 두말할 것 없이 초보였다. 낚시에도 초심자의 행운이 따르는지 몰랐다. 곧 한 낚시꾼이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딸과 함께 다가왔다. 나이가 몇 살 많지도 않아 보이는 그는 우리가 잡은 생선들을 보더니 어린 친구들이 대단하다며 치켜세웠다. 그리고는 옆에서 낚시를 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편한 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캠핑의자에 몸을 묻고 필립 말로의 활약상을 마저 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책 너머로 아이의 실루엣이 멈춰 선 게 보였다. 책을 덮었다. 낚시꾼의 딸아이가 자신이 먹던 과자를 내게 내밀고 있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아이와 낚시꾼을 번갈아보았다. 그러자 아이가 내 무릎 위로 씩씩하게 기어 올라와 과자를 입에 넣어주었다.
“고마워.” 나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땅에 내려주고 낚시꾼을 쳐다봤다. “애가 귀엽네요.”
“그쪽이 맘에 드나 봐요.”
낚시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가 그에게로 돌아가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렸다. 낚시꾼은 더플백에서 버너 두 개를 꺼내더니 코펠을 하나씩 얹었다. 아이의 라면에는 스프를 반만 넣고, 자신의 라면에는 스프와 청양고추를 썰어 넣었다. 그는 우리 몫까지 끓이고 있으니 함께 먹자고 했다.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낚시꾼은 신문사 기자였다. 아이와 휴가를 왔다고, 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아이랑 보내는 시간이 적어서 아쉽다고 했다.
“어떤 기사를 쓰세요?” 동준이 물었다.
“문화부 기자입니다. 지역 신문에 <젊은 예술가와의 만남>이라고, 말 그대로 동시대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하고 있어요.”
N과 나는 그 기사를 잘 알고 있었다. 동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자에게 물었다.
“혹시 송 기자님 아니신가요? 최근에 시립교향악단 지휘자 인터뷰하셨죠?”
“엇, 아시나요?”
송 기자는 얼떨떨한 듯했다. 동준은 기사를 잘 보고 있다며 악수를 청했다. 송 기자의 기사는 작은 신문에 격주로 연재되어 예술애호가들에게 잔잔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몇 달 전 <리플리>를 돌려보던 모텔에서 우리는 자료조사 도중에 그의 연재기사를 발견하고 통독했다. 교양 함양과 최근 예술 동향을 파악하기 좋았다. 그렇다고 해도 굳이 송 기자를 아는 척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동준은 자신 역시 작은 미술관에서 큐레이터와 도슨트를 겸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태연하게 본분을 다했다.
“아는 분이야?” 내가 물었다.
“문화예술계에서 뜨고 있는 기자님이셔.” 동준이 호쾌하면서도 단호한 제스처를 보였다. “안 그래도 몇 달 전에 송 기자님 기사에서 접한 설치미술가 분이랑 전시 계약을 하려 컨택 중이었거든요.”
저 미친놈이? 나는 생각했다.
“그래요? 어디 갤러리라고 하셨죠?”
송 기자와 동준은 명함을 주고받았다. 나는 낚싯대 끝에 달린 방울을 바라보며 이마를 문질렀다. 송 기자의 딸아이가 낚시가방 옆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미끼통에서 지렁이를 한 마리씩 꺼내 풀숲으로 달려가 놓아주기를 반복하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맑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검지로 입을 가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송 기자와 동준은 대화 삼매경이었다. 송 기자는 설치미술가와의 연락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N이 어쩌려고 일을 저렇게나 벌이는지 알 수 없었다. 송 기자는 당장 설치미술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어, 난데, 최근에 〇〇갤러리에서 메일 하나 받지 않았어? 응, 전시 기획한다는 거.”
좆됐네, 나는 생각했다.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다. 될 대로 되라지.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궁리하며 초조히 통화가 삐걱거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통화는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동준 또한 그러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평온했다. 아니, 전시 계약이 성사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빛으로 들떠 있었다. 송 기자는 방금 그 미술관 관계자를 만났다며 조만간 셋이서 자리를 만들자고 얘기했다. 그들이 후속 인터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고 나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우리가 만든 명함들은 가상의 직장을 다니는 가상의 인물들 것이었다. 전시 계약을 위한 컨택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설마하며 동준의 명함에 있는 미술관을 검색했다. 동명의 미술관 사이트가 떴다. 빌어먹을. 사이트에 접속해 직원 소개란을 확인한 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거 완전 미쳤네, 나는 생각했다.
“입김 같은 건 없어요. 그래도 호의적으로 검토해 줄 겁니다.” 전화를 끊은 송 기자가 동준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런 데서 송 기자님을 뵐 줄이야.”
“제가 뭐라고. 이렇게들 돕고 사는 거죠.”
“아, 기자님 혹시 술 좀 즐기시나요?” 동준이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영민이가 갤러리 근처에서 펍을 하거든요. 근처에 오실 일 있으면 제가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한번 들르시라고 했다. 송 기자도 기꺼이 들르겠노라고 화답했다.
“라면 이상해.” 아이가 칭얼거렸다.
라면 물이 거의 다 졸아들고 있었다. 송 기자가 급하게 불을 껐다. 나는 N이 내 명함을 건넬 기회를 마련했음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어차피 놓친 기회였다. 그의 정신 나간 행보 탓에 명함을 건넬 기분도 아니었다. 나는 송 기자의 눈을 피해 동준에게 미간을 찌푸리며 대체 뭐냐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동준은 무슨 영문이냐는 듯 눈만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송 기자가 라면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겠다며 미안해했다. 우리는 어차피 일어날 참이었다며 송 기자와 다음을 기약하고 텐트로 돌아갔다. N이 낚시도구를 텐트 전실에 내려놓았다.
“어떻게 된 거야? 〇〇갤러리, 서동준 큐레이터. 명함 다 가짜 아니었어?” 내가 따져 물었다.
“배 안 고파? 산 아래 매운탕 집 있던데.”
“사칭은 범죄야. 재미로 가짜 인물 연기하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아이, 진짜…….” N이 난감하다는 듯 잠시 눈가를 문지르며 고민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걱정하지 마. 네 건 다 가짜 명함이니까. 나도 실제 존재하는 사람 명함은 처음 뽑아 본 거고.”
“그러니까 왜 그랬냐고?”
“스릴 있고 재밌잖아.” N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잊었나 본데, 우리 아직 여행 중이야. 난 서동준, 넌 이영민인데 우리가 이런 대화를 하는 게 말이 돼?”
“지금 그게 중요해?”
“이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
“실재하는 사람을 사칭하는 건 너무 위험해. 들통 나는 순간 이 여행도 끝이야.”
“걱정 마세요. 그렇게 위험한 짓이면 내가 하겠어?” N이 장난스럽게 내 팔을 툭 쳤다. “됐고, 이영민. 매운탕이나 먹으러 가자.”
N은 그러고서 텐트를 나섰다. 나는 뒤에서 N을 불러 세웠지만 그는 이미 동준이 된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