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청년 누아르」 ③
“왔냐?”
셜록이다. 탁자 위 팬티 차림의 남자는 손발이 뒤로 묶인 채 돌돌 말아놓은 넥타이를 물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 피로 범벅인 얼굴에서 알아듣지 못할 신음이 새어나왔다.
“아오, 시끄러.” 셜록이 귀를 후볐다. “사장님, 손님 왔잖아요. 꼴사납게 뭐하는 거야.”
녀석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남자의 입에서 넥타이를 빼 바닥에 던졌다. 침이 묻은 손가락을 남자의 머리카락에 닦았다. 남자가 빨리 갚겠다며 우는소리를 냈다.
“지껄이시라고 빼 준 거 아니야.”
셜록이 탁자 아래에서 삼십 센티미터쯤 되는 칼을 꺼내 들었다. 남자가 사색이 되어 살려달라고 빌었다. 셜록은 그의 뺨 양쪽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칼끝을 그의 벌어진 입에 살짝 집어넣었다.
“물어.”
“에?”
“물라고. 콱 쑤셔버리기 전에.”
남자가 칼끝을 이빨로 물었다. 칼이 길어서 휘청휘청 흔들렸다. 셜록이 빙글빙글 웃었다.
“꽉 물고 있어. 입 놀리다 혀 베이지 말고. 떨어뜨리면 허벅지 나가요, 알지?”
녀석이 남자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남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바들바들 떨면서 칼끝을 필사적으로 물고 있었다.
“와서 앉아.” 셜록이 날 보며 다시 싱긋 웃었다.
나는 탁자와 세트로 놓인 검은 가죽소파에 천천히 다가갔다. 탁자 측면에 있는 이인용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 꼴이 더욱 말이 아니었다. 셜록은 손목시계를 차면서 책상 옆으로 가 소형 냉장고를 열었다.
“N이 말 안 해 줬나보네. 뭐 마실래? 커피? 맥주? 아님 보드카?”
으으으, 하고 남자가 용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셜록이 맥주 두 병을 가져왔다. 뽀리가 병따개로 뚜껑을 따더니 나를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나는 애써 긴장을 감추며 사무실을 둘러봤다. 책상 하나와 벽을 가득 채운 책장. 책장에는 책 한 권 없이 죄다 장부와 파일로 채워져 있었다. 셜록이 내게 맥주 한 병을 건네고 남자 정면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틀렸어.” 셜록이 남자를 쳐다보며 내게 말했다.
“뭐가?”
“운송업은 돈이 안 돼. 사채는 돈이 될 거 같지? 그렇지도 않아. 이런 씹새들이 돈을 안 갚아서.” 녀석이 탁자를 걷어찼다. 남자가 눈을 질끈 감으며 턱에 힘을 줬다. 셜록이 내게 병을 내밀어 건배를 청했다. “니들 돈 나오는 구멍은 따로 있어.”
“누가 물어봤냐?”
“네 머리 돌아가는 거야 뭐, 뻔하지. 새꺄 팔 아프다.”
그가 술병을 든 손을 한 번 더 까딱였다. 나는 괜히 울대를 문지르며 태연한 척 말했다.
“일단 이 사람 좀 치우고 얘기하지?”
“치우고?”
“그래. 치우고.”
셜록이 피식 웃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남자를 쳐다봤다. 입가와 뺨에 근육경련이 일면서 칼이 심하게 흔들렸다. 셜록이 맥주병을 거두며 한 모금 마셨다.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드드드, 하고 소리를 냈다. 셜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고요?” 녀석은 허리를 숙여 남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드, 드,”
“드드드, 뭐래 씨팔.”
셜록이 빈정거리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 순간 칼이 남자의 입에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바닥에서 두 발을 뗐다. 칼은 남자의 허벅지에 떨어졌다. 칼등으로. 그리고 탁자에 한번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요란하게 떨어졌다. 남자는 입도 못 다물고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경악과 안도가 섞인 울음소리를 냈다. 칼은 셜록의 발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칼에서 녀석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남자의 입에서 자신의 발 앞까지 칼이 떨어지는 동안 셜록은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오른발만 삼 센티미터 정도 살짝 돌릴 뿐이었다.
“뭐라고요?” 셜록이 성가시다는 듯 물었다.
“더, 더 깊게, 깊게 넣어 주세요.”
“멘트가 좆같네. 집에 가셔야죠, 사장님!” 셜록이 칼을 주워 살폈다. “날 상했잖아. 잘 물고 있으라니까.”
남자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연거푸 사과했다. 얼른 그를 돌려보내고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거들 방법이 없었다. 셜록이 남자 곁에 칼을 툭 던져두고 앉았다. 칼이 챙그랑거리며 탁자에 떨어지자 남자가 움찔거렸다.
“너 현찰 가지고 있냐?” 셜록이 내게 물었다.
“응.”
“적선 좀 해라.”
셜록은 떡대들에게도 돈을 걷으라했다. 모두 실실 웃으며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뽀리가 돈을 걷어서 셜록에게 전했다. 나도 오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셜록에게 주었다. 녀석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지폐를 셌다. 천 원짜리부터 오만 원짜리까지 다양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남자는 덜덜 떨고 있었다.
“아이, 쪼잔한 새끼들.” 셜록이 지폐를 세며 말했다. “천 원이 뭐야, 천 원이. 야, 씨팔 쪽바리 돈 낸 새끼 누구야?” 그가 엔화를 팔랑팔랑 흔들며 웃었다. 다른 떡대들도 낄낄거렸다. “뭐, 이것도 돈은 돈이지. 근데 모자라겠다야. 뽀리, 가서 다발 하나 들고 와.”
뽀리가 책상 뒤쪽 금고에서 노란 돈다발 한 묶음을 가져왔다. 셜록은 방금 걷은 돈을 돈다발에 얹어서 남자의 손발을 묶은 것과 같은 케이블타이로 묶었다. 남자의 무릎 앞에 돈다발이 던져졌다.
“사장님 거지됐잖아.” 셜록이 돈다발을 눈짓했다. “이거 갖고 가요. 뽀리, 너 좋아하는 숫자가 뭐냐?”
“숫자하면 럭키세븐이죠.” 뽀리가 뒷짐을 지고 씩 웃었다.
“오, 센데?” 셜록이 장난스럽게 말하더니 녀석은 나를 보았다. “너는?”
“일.”
“좋아.” 셜록이 벌떡 일어나 돈다발을 들고 남자의 뺨을 툭 건드렸다. “사장님, 내 친구한테 한턱 쏴요. 사장님 살렸으니까. 이거 들고 가서 생활비에 보태요. 이자는 십칠 퍼센트.”
“아닙니다. 안 주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싫음 백칠 퍼센트 하든가.”
“괜찮습니다, 정말……”
남자가 흐느끼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셜록은 그 모습을 잠시 보더니 남자의 턱 밑에 손을 대고 고개를 쳐올렸다.
“애새끼들 생각은 안 해요? 애비 잘못 만난 것도 씨팔 좆같을 텐데 다 자랄 때까지는 책임져야지. 안 그래?”
“괜찮습니다, 돈 있습니다.”
“있어? 근데 내 돈은 왜 안 갚아?” 셜록이 돈다발로 내리칠 듯 손을 치켜들었다.
“아뇨, 없습니다.” 남자가 납작 엎드렸다. “없는데, 그래도 괜찮습니다.”
“예절도 저당 잡히셨나. 사람이 말하는데 왜 눈을 안 봐.” 셜록이 그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좋은 말로 할 때 가져가요. 싫으면 아가리에 물고 드럼통으로 들어가든가. 노잣돈으로 두둑하니 좋겠네. 저승에서 노름도 마저 하고, 응?”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던데. 부자 되시겠습니다.” 뽀리가 웃으며 거들었다.
남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돈다발을 받아들었다. 셜록이 남자의 머리를 내리치듯 쓰다듬었다.
“인정 베풀 때 넙죽 받으면 좋았잖아요. 제가 원래 기회를 두 번씩 안 주는 놈이라 이자는 백칠 퍼센트로.” 셜록이 다시 자리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 달 뒤에 사장님 동네에 백화점 첫 삽 뜨는 거 아시죠? 그 전에 갚아요. 사장님 멱따서 고사 지내기 싫으니까. 모셔 가.”
셜록이 손짓하자 떡대들이 남자를 손발이 묶인 그대로 끌고 나갔다. 뽀리가 물티슈로 탁자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소란이 가시자 셜록이 칼을 소파 팔걸이에 슥슥 닦은 뒤 탁자 밑에 두었다.
“칼만 들이대면 모두가 자기욕망에 정직해.” 셜록이 내게 말했다. “살아보니까 이만한 지혜가 또 없어.”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이거 봐.” 셜록이 탁자 아래서 칼을 하나 더 꺼냈다. 양날칼이었다. “이거 썼으면 저 새끼 응급실 직행이었다. 내가 인정 넘쳐서 얼마나 다행이야.”
“씨발, 네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고.”
“바지사장이야. 나가야 하니까 빨리 마셔.”
그가 칼을 내려놓고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즐기는 거 같던데.” 내가 말했다.
“즐겨야지 그럼.” 셜록이 소파에 몸을 묻으며 권태롭게 말했다. “이 바닥 구르면서 맨 정신인 게 미친 새끼 아니냐.”
나는 손에 쥔 차가운 맥주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지.” 내가 중얼거렸다.
“그렇지. 아무래도.”
나는 시선을 들어 텅 빈 듯한 녀석의 눈을 쳐다봤다. 세월은 그의 눈에 맹독을 남기며 관통했다. 무신경이라는 맹독을. 셜록이 맥주병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까 그놈이 어떤 새낀지 알아? 십 대 때 건달 따까리로 이 바닥 발 들여서 지금은 사창가 포주 노릇 하는 놈이야. 남의 업장 가서 깽판치고 상납금 삥땅치고 하우스서 죽치고 여자들이랑 떡치고. 그딴 인생 삑사리 나는 거야 놀랄 일도 아니고.” 셜록이 엄지와 검지를 맞닿아 동그라미를 그렸다. “원래 그렇잖냐. 쉽게 돈 벌던 새끼들은 쉽게 벌 요량만 하고, 큰돈 만지던 놈들은 큰돈 만질 생각밖에 안 해. 더러운 돈 맛보던 파리새끼가 어디서 입맛 다시겠냐? 썅년들 고혈 빠는 걸로도 모자라니까 지 대가리 금고까지 손댄 거지. 당연히 다 꼬라박고 살길 찾겠다고 여길 찾아왔는데,” 셜록이 다리를 뻗어 남자가 무릎 꿇고 있던 탁자에 두 발을 올렸다. “혀 빼물고 찾아온 게 벌써 몇 번이야. 씹새가 이자 갚는 성의도 없어. 혀 뽑을 때 됐지. 여긴 그런 새끼들밖에 안 와.”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셜록의 말투에는 무신경함과 함께 묘하게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정신 놓고 춤추는 듯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그걸 숨기지 않겠다는 듯 셜록은 연신 빙글거리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내가 대꾸했다. “이런 짓이 괜찮다는 거야?”
“여긴 그런 새끼들밖에 안 온다니까.”
“아니 그러니까,”
“여긴, 그런 새끼들밖에 안 온다고.”
셜록이 정색하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고. 정적이 흐르고 나의 시선이 그의 가슴께로, 무릎으로 떨어졌다.
“나가자.” 녀석이 말했다.
셜록과 뽀리는 일 층 후문으로 나를 데려갔다. 건물 뒤편에는 물류창고로 쓰는 수십 채의 컨테이너가 있었다. 셜록은 가장 멀리 있는 창고의 잠금장치를 열었다. 문이 귀 아픈 소음을 내며 열렸다. 안에는 내가 자취방을 떠나며 부친 짐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벽면에 걸려 있는 쨍한 빨강과 노랑의 쓰리피스 정장이 눈에 띄었다. 셜록은 철제서랍에 작은 열쇠를 꽂고 돌려 열었다. 대포폰이 가득했다. 여러 개를 집어 보더니 가장 멀쩡해 보이는 것을 두 개 골랐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대포폰 두 개에 각각 전화를 건 뒤 내게 내밀었다.
“내 번호야. 알아서 저장해. N 죽었다는 소식 아닌 이상 웬만하면 연락하지 말고.”
“지금 이 깡패짓, N이랑 같이 하는 거야?”
“알아서 뭐하시게요? 주는 거나 좀 받아 씹새야.” 셜록이 대포폰을 철제서랍 위에 신경질적으로 놓았다. 그는 담배를 한 대 물고 불을 붙였다. “너도 N만 믿고 살다 좆되지 말고 정신 차려라.”
“좆되다니?”
“뭘 물어? 남한테 빌붙어 사는 인생 좆되는 건 당연하지.”
“네가 그런 말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가.” 셜록이 풀썩 웃었다. 입 밖으로 담배연기가 흩어졌다. “그래도 언제나 내가 너보다는 나아.”
“뭐?”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늘 내가 너보다 낫지.” 그가 어렴풋한 냉소를 띠며 말했다. “물론 너보다 나은 게 자랑은 못 되지만.”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셜록은 창고 열쇠를 뽀리에게 주고 유유히 사무실로 돌아갔다. 나는 어두운 물류창고에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뒤늦게 부아가 치밀었다. 뽀리가 멋쩍게 웃으며 두 손을 손뼉 치듯 소리 나게 맞잡았다.
“찐친이신가 봐요. 훈훈한 재회. 하하.”
“찐친은 무슨. 빌어먹을.”
뽀리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대포폰 두 개를 낚아채듯 쥐고 컨테이너를 나섰다. 뽀리가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했다. 잠깐 사이 벼락처럼 몰아친 일들로 머리가 멍했다.
터미널로 가는 택시에서 N에게 전화를 걸었다.
“벌써 나왔어? 회포라도 풀 줄 알았더니.”
“회포는 무슨, 그 새끼 양아치 다 됐어. 걔가 왜 거기 있어?”
“사장이니까 거기 있지.”
“아니 그러니까 걔가 왜 사장 짓을 하고 있냐고, 그런 데서.”
“택배회사 사장이 뭐가 어때서?”
“택배는 개뿔.”
“이따 얘기하자. 내가 갈 테니까 터미널에 있어.” N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터미널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N을 기다렸다. N은 외제차를 끌고 나타났다. 셜록 명의로 렌트한 차였다. 커피를 사들고 차에 올라탔다. N이 고속도로로 진입하며 속도를 높였다.
“웬일로 운전을 해?” 내가 물었다.
“좋은 데로 모시려고.”
N은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많지 않은 차들을 여유롭게 추월하다 휴게소가 나오면 번번이 들렀다. 줄담배를 피우고 호두과자를 사고 핫바를 사 먹고. 셜록에 대한 이야기는 꺼낼 생각도 없어 보였다. 세 번째 휴게소부터 나는 내리지 않았다. N은 두어 군데 휴게소를 더 들르고서야 나선형 도로를 타고 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차는 깎아지른 산을 왼편에 끼고 나 있는 해안도로를 달렸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차창을 뚫고 들어오는 뜨거운 햇볕에 조금씩 몽롱해졌다. 고속도로에서는 오지 않던 졸음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 때마다 손발이 묶여 있던 남자가 떠올랐다가 눈을 뜨면 차창의 풍경이 앨범을 넘기듯 바뀌어 있었다. 산으로 올라가는 이면도로를 타면서 또 다시 선잠에 빠졌다. 셜록이 내 입에 돈뭉치를 쑤셔 박는다. 실밥이 입에 들어갔을 때와 같은 맛이 난다. 가위에 눌린 듯 선잠과 현실의 경계에서 몸부림쳤다. 어느덧 차가 부드럽게 후진하는 느낌이 들었다. 곧 차가 멈추고 시동이 꺼졌다. 땀에 흠뻑 젖은 채 눈을 떴다. N이 차에서 내렸다. 정면에는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고도가 높은지 이면도로 가드레일 너머로 시야에 낙차가 생겼고, 낮은 산봉우리 두어 개와 두터운 해수면이 내려다보였다. 나도 안전벨트를 풀고 따라 내렸다. 차를 댄 곳은 도로 옆에 작게 만들어진 주차장이었다. 빛바랜 녹색 보도블록 위에 흰 선이 그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깨져 있는 보도블록과 마구 자란 잡풀들로 보아 사람의 손길을 타는 곳 같지 않았다. 차 뒤편에는 까마득하게 높고 가파른 절벽이 병풍처럼 나 있었다. 나는 이면도로를 건너 가드레일 쪽으로 향했다. 아래에도 수직이나 다름없는 경사의 벼랑이 산 아래 짙은 수풀과 맞닿아 있었다. 정확한 비유일지는 모르나 삼단으로 쌓아올린 케이크의 이 층 가장자리에 걸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땀이 마르며 한기를 느꼈다.
“거기 서 있다가 로드킬당한다.”
N이 차 트렁크를 열며 소리쳤다. 나는 도로를 건너 차로 돌아갔다. N은 담배를 물고서 종이 쇼핑백을 꺼내 건넸다. 바람막이가 들어 있었다. 상표도 붙어 있었다.
“바람막이를 샀어? 이 여름에 왜?”
N은 담배를 입에서 떼고 연기를 길게 뿜었다.
“치수는 맞을 거야. 따라와.”
“어째 단번에 설명해 주는 법이 없지?”
“곧 알게 될 텐데 뭘. 재밌잖아.”
N이 웃으며 트렁크를 닫고 차문을 잠근 뒤 도로변을 따라 걸었다. 나도 천천히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