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28화

3부 「청년 누아르」 ④

by 윤아무개

주차장이 끝나는 지점부터 이면도로와 절벽 사이가 서서히 좁아졌다. 앞서 걷던 N이 어느 순간 발길을 살짝 돌리더니 까마득하게 높은 절벽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나는 황급히 따라붙었다. N이 사라진 곳에 다다르자 절벽이 골목처럼 꺾이며 오목하고 널따란 공간이 드러났다. 삼단 케이크의 이 층 한쪽을 주걱으로 큼지막하게 퍼낸 듯한 지형이었다. 먼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오목한 절벽 속을 휘돌아 솟구쳤다. 절벽 안쪽 터는 한번 정리를 했는지 누렇게 말라빠진 잡풀이 베인 흔적이 조금씩 남아 있을 뿐 대체로 깔끔했다. 가장 안쪽에 나지막한 집 한 채가 동그마니 서 있었다. 외관은 깔끔해 보였는데 조금 다가가자 역한 페인트 냄새가 풍겨왔다. 햇빛은 절벽에 가려 집의 절반도 못 비추었고, 그마저도 곧 사라질 듯했다. 산사태라도 나면 소리 소문 없이 생매장당할 곳이었다. N을 따라 집으로 다가갔다.

“이런 데 집이 있어도 돼?”

“그러니까 지었겠지?”

N은 집 앞에서 담뱃불을 밟아 끄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나는 먼 바다를 한번 뒤돌아보고 다시 집을 돌아봤다. 가까이 가자 새로 칠한 페인트가 반들거리는 빛을 내며 더욱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서자 정면에 어둡고 기다란 복도가 보였다. 복도 양옆과 정면에 모두 방이 하나씩 있었다. 신발을 벗으려는데 N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신발 신고 들어와.” 집안 어딘가에서 그가 소리쳤다. 복도를 몇 걸음 걸으니 한 시 방향에 복도와 이어진 또 다른 공간이 보였다. 아마 부엌일 듯싶었다. 나는 도배 풀 냄새가 희미하게 남은 복도 벽을 짚었다. 선득했다.

“안 들어와?” N이 왼쪽 방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방 안은 형광등을 켜놨지만 싸늘하고 음침한 분위기였다. 새로 도배한 흰 벽지는 찬 공기 때문인지 인정 없고 차가워 보였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창문 아래 눈에 익은 소파가 놓여 있었다. 적시타네 인쇄소에 있던 싸구려 소파였다. 나는 다가가서 가죽으로 덮인 팔걸이를 손으로 꾹 눌러보았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쓸 만해. 혼자 있을 때 침대로 쓰면 딱 좋아.”

N이 다가와 소파에 몸을 던졌다. 소파의 스프링이 요란하게 그의 몸을 떠받쳤다.

“허리 나가겠다. 이 집은 언제 구한 거야? 도배 새로 한 것 같은데.”

“최근에. 한동안 이 집 찾는 데 시간을 들였지. 아지트로 쓰기 좋을 것 같지 않아?”

“서빙고로 쓰기 좋을 것 같아.”

나는 쇼핑백에서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다. 여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기가 엄습했다. N이 손목시계를 보더니 한쪽 입가를 볼 끝으로 당겼다.

“좀 쉬고 있어.” 그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일 보러 다녀와야 해서, 이따 저녁거리 사들고 올게.”

“어디 가는데? 같이 갈까?”

“피곤해 보이던데 좀 쉬어. 침낭은 소파 옆에 있고, 전기난로도 있는데 틀어줘?”

“그만큼 춥진 않아.”

나는 팔을 감싸며 말했다. N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그래도 낮이라고 창문이 희미하게 밝았다. 침낭을 꺼내기 귀찮았다. 나는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소파에 누웠다. 떼지 않은 상표가 뒷덜미를 살짝 찔렀지만 그대로 두었다. 소파의 딱딱한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잠이 쏟아졌다. 팔짱을 끼고 모로 누웠다. 멀리서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눈을 떴을 때는 창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옅은 빛도 사라져 있었다. 목이 칼칼하고 코가 찡했다. 바람막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어두운 방안을 멍하니 봤다. 곧 눈이 어둠에 적응해 문이 보였다. 조심스레 방을 나서며 방 안의 불을 켰다. 등 뒤의 불빛으로 복도가 조금 밝아졌다. 나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복도 우측의 방이 열려 있었는데 안은 비어 있는 듯했다.

집을 나섰다. 사방이 캄캄했다. 한곳만 빼고.

“일어났어?”

캠핑 의자에 앉아 있던 N이 요리용 집게를 흔들었다. 드럼통 화덕에 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굽고 있었다. 나는 불 가까이 갔다. 고기와 함께 버섯과 양파, 마늘도 석쇠 가장자리에 늘어놓고 굽고 있었다. 고기에서 기름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불길이 몸을 떨었다. 머리가 멍했다. N은 돼지고기, 소고기, 양고기, 오리고기를 무작위로 조금씩 구웠다. 나는 소고기 몇 점을 입에 넣고 아이스박스에서 맥주 두 병을 꺼냈다. 적당히 배를 채울 때까지 번갈아 고기를 구웠다.

“직접 구워 먹으면 맛은 좋은데 대화를 못 해. 정신이 하나도 없어.” N이 한숨 돌리며 집게로 집을 가리켰다. “좁긴 해도 나쁘지 않지?”

“좁지도 않아. 이런 덴 어떻게 찾은 거야?”

“발품 팔았지. 부동산에 가서 제일 안 팔리는 집들 돌아보자고 했어.” N이 구운 김치로 고기를 감쌌다. “을씨년스럽잖아. 싼값에 샀지. 나는 마음에 들어.”

나도 그렇다고 화답했다. N이 잘 구워진 고기를 석쇠 가장자리로 하나씩 옮겼다.

“셜록이 우리 뒤를 봐주고 있어. 필요한 물건 있으면 구해다 주고, 필요한 정보도 찾아봐 주고. 너도 필요한 거 있으면 걔한테 연락하면 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셜록을 만났을 때의 흥분은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한나절이 지나는 동안 아무래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세상엔 이런저런 사람이 있고 각자 삶의 방식이 있으니까. 물론 옳지 않은 방식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만,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내게 그의 삶을 꾸짖을 자격이 있을까.

“우리 세 번째 여행 기억나?”

N이 갑자기 물었다. 나는 양고기를 입에 넣으며 잠시 생각했다.

“안현근, 박승재. 그날 맞지? 배구선수가 다른 손님 싸대기 날린 날.”

“맞아. 그날 네가 염색머리한테 정말 괴롭힘 당했었느냐고 물어봤잖아?”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와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내며 절벽 속을 휘돌았다. N의 입에서 나올 말이 왠지 불안했다.

“사실이야. 승재가 아니라 내가 겪은 일이었지. 보육원에서 처맞고 살았거든. 거의 매달 병원에 들락거리다가 나중에는 입원까지 했지. 그 자식 얼굴 딱 보니까 기억나더라.” N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 입양아야.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계신 어머니도 다 양부모님이지. 내가 얘기 했었나?”

“아니.”

N의 마지막 질문은 정말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이런 이야기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저 가만히 흔들리는 불길만 쳐다봤다.

“제일 화가 나는 건 그때 내가 박승재가 아니었다는 거야. 걔 얼굴을 보는 순간 박승재고 나발이고 다 까먹고 나로 돌아왔다는 게 참을 수 없이…….”

과거를 불러오는 순간들이 있다. 기어이 과거의 일들, 과거의 나 자신을 불러들여 스스로를 우습게 만드는 순간이 찾아오고는 한다. 나는 종이컵을 하나 꺼내 구겨서 수그러지는 불길에 던져 넣었다. 불길이 우아하게 종이컵을 감싸 안더니 순식간에 홀랑 태워먹었다. 그게 보고 싶었고, 봐서 만족스러웠다. 허리를 세웠다.

“염색머리 그 씹새끼, 잘 처맞았네.”

내가 기지개를 켜며 가볍게 대꾸하자 N도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가 고기를 뒤집기 시작했다.

“돈 많은 부부가 찾아와서 입양을 원한다고 했어. 부부는 여러 번 와서 많은 아이들과 대화도 나누고 시간을 보냈지. 그때 내가 아마 여섯 살이나 일곱 살이었을 거야. 나는 원래 우선순위가 아니었어.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 부부에게 입양됐지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N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보육원에서 나는 얌전하고 순종적인 아이였어. 늘 문제의 중심에 서 있긴 했지만.”

“문제?”

“애들이 늘 괴롭혔거든.”

인연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수많은 요소 가운데에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고 믿는다. 가령 첫 만남의 시기. 내가 N을 열여섯 살이 아니라 좀 더 어렸을 때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콕 집어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아마 무서워하며 피했으리라. 세상에는 그런 나와는 달리 특별한 아이를 밟아 죽이려는 아이들도 있다. 양쪽 다 겁쟁이이긴 매한가지지만.

“날 입양한다는 남자가 내 앞에 앉아 나랑 눈높이를 맞췄어. 집으로 가자, 그렇게 말했지. 그날 집이라는 곳으로 가는 차 안에서 처음 그 말을 들었어. 인생에는 언제나 비상구가 필요해.” N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들도 알고 있었겠지. 나한테는 당신들이 비상구라는 걸. 그때 나는 직감적으로 확신했어. 내가 그들의 훌륭한 아들이 되리라는 걸 말이야.”

N이 까맣게 탄 고기 몇 점을 골라내 불 속에 던졌다. 떨어진 고기 위로 불길이 반투명한 커튼처럼 일렁였다. N은 식은 고기를 집게로 집어 석쇠 중앙에 눌러서 데운 뒤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목이 탄산을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맥주를 들이켰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만 했어. 당신들의 호의에 보답해야 했지. 부모님이 원하는 인간상, 이라고 짐작할 만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어.”

“어떤 사람?”

“능력 있고 바르고, 혁신적이며 과감한 사람. 기억하냐? 나 중학생 때 전학 가서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상 탄 거.”

“그래. 기억난다.”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 웃었다. “조례시간에 낭독도 했었잖아. 그때 선생이고 애들이고 다 뻑 갔었는데.”

“그때 다른 애들이 쓴 글도 궁금했었어. 선생님께 부탁해서 본심에 올랐던 글 네댓 편을 받아 읽었지. 그중에 내 글과 접전을 벌인 글이 있었는데 작성자가 너더라고.”

“나?”

나는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이면 그럴 법했다. N은 기억을 또렷이 하려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응. 그때 네가 쓴 게 아마…… ‘인간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존재의 핵심은 증명이 아니라 가치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본연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훼손하지 말아야 하는 존재다.’ 뭐 이런 이야기였을 거야.”

녀석이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듯 천천히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나는 참 어렸다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네 글을 읽은 그때가 내 삶을 반추하게 되는 순간이었어. 나는 줄곧 내 가치를 증명하기 급급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보존되는 가치가 있다?” N은 석쇠 아래서 일렁이는 불빛을 응시했다. “넌 내가 전학 오기 전까지 글쓰기로 계속 상을 탔다고 들었어. 그런데 늘 타던 상을 내가 가로챘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

“상이 뭐 별거라고. 잘하는 사람이 타는 거지.”

“그래.” N이 웃었다. “수상은 증명이고 글은 본연의 가치지. 상을 못 탄다고 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너는 알았어. 너한테는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지.”

글쎄. 나는 반박할 수도 있었다. 교내 글짓기 대회는 별게 아니라고, 특히 그때의 나처럼 수상실적이 중요치 않은 학생에게는 못 받아도 그만인 정도가 아니라 필요 없는 대회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N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어릴 때나 그랬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업할 때 봤잖아.”

“맞아. 사업할 때는 정신 나간 새낀 줄 알았지.”

“놀리냐?”

우리는 함께 웃었다. 날벌레 한 마리가 불꽃 속으로 들어가 몸을 불살랐다. N이 말을 이었다.

“나는 내 사고의 뿌리를 되짚어갔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 그건 어디서 온 걸까. 보육원에서부터였겠지. 입양된 후로도 지속됐고. 왤까? 양부모한테 버려질까 봐? 보육원으로 돌아갈까 봐? 그럴 수 있지. 그런데 그런 불안은 어디서 온 걸까? 누군가는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달라. 그건 통념이야. 내가 이 사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머릿속에 배어들 수밖에 없던 사고지. 아무리 어렸을 때라고 해도 말이야. 나는 어디서든 버려질 수 있다, 친아들이 아니니 사랑을 당연히 베풀 리 없다, 그 사랑에조차 한계가 있다……. 진실은 말이야,” N이 나를 쳐다봤다. “우리 양부모님은 나를 사랑했어. 무조건적으로. 좋은 분들이었지. 통념이 빚은 강박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어.”

우리는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N이 일어나 아이스박스에서 맥주 두 병을 꺼내 하나 건넸다. 표면이 젖어 있었고 기분 좋게 시원했다. 우리는 건배하고 마셨다.

“그 후로도 나는 내 존재와 쓸모를 증명하며 살았지만 더 이상 통념에 의한 강박 때문이 아니었어. 증명이 살아가는 데 유리하니까 선택한 것뿐이지. 나는 통념을 혐오해. 사회 구성원이라면 갇힐 수밖에 없는 패러다임을 의심해.” N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인생은 거대한 실험이야. 인간은 과연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가치를 증명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인간에게 정말 훼손되지 않는 가치가 있는가. 그걸 찾아보는 거야.”

“지금 이 여행이 그걸 찾는 방법이라는 거야?”

N은 그렇다는 눈짓을 보이고는 불을 바라보며 나른하게 말했다.

“입양된 지 이 년쯤 됐을 때였어. 초등학생 때였지. 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정월 대보름 축제에 간 적이 있어. 집 근처 강변에 넓은 공터가 있었는데, 거기서 매년 정월대보름 축제가 열렸어. 음식도 팔고 페이스페인팅, 풍선아트 같은 걸 하는 천막들도 줄지어 있었어. 애들한테 인기가 있었지. 학교 친구들도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도 하고 떡볶이도 나눠 먹고, 재밌었어.” N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해가 완전히 졌을 때 사람들이 강변에 몰려들었어. 거기에는 아주 아주 높이 쌓아올린 각목과 볏짚들이 있었지. 어릴 때의 체감 상으로는 건물 이삼 층 높이는 되는 것 같았어. 행사 관계자 두 명이 사람들을 안전한 거리까지 떨어뜨려놓고, 볏짚에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붙였어.”

N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화덕 안에서 우아하게 춤추고 있는 불길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불길은 예쁘고 아름다웠다.

“그건 화염이었어. 화염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난생처음 다리가 후달리도록 깨달았어. 지옥이 있다면, 사람들이 말하듯 끔찍한 불로 타오르는 지옥이 진짜 있다면, 아마 저런 불로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어. 맹수같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은 역동적이고 폭력적이고 매혹적이었어. 이런 시시한 불꽃 따위가 아니었다고.” N이 화덕을 툭 찼다. 석쇠가 달크당하고 흔들렸다. “달집태우기는 그때 이후로 보러 간 적이 없어. 뇌리에 인상 깊게 박혀서 다시 볼 필요도 없었지.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그날의 달집태우기는 기억 속에서 점점 더 커지고 강렬해졌어. 어릴 때의 머릿속에 박힌 강렬한 인상은 커가면서 그 의미를 언어로 정립해나갔지. 화염. 불꽃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불살라버리고 강렬히 자신의 존재를 발하던 화염. 아름다운 점이 하나도 없는 대상에게서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느꼈던 최초의 순간이었어. 그런 거야. 결국 내가 되려면 이미 주어진 나라는 존재를 불살라야 하지.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직업, 사상, 가치관, 습관, 관심사, 그리고 그 정체성을 대표하는 이름까지 모두 불살라버려야 하는 거야.” N이 석쇠를 기울여 식은 고기를 전부 불길 속으로 쏟아버렸다. “옛날에 네가 작명소랑 사주 집들 다 사기꾼이라고 했었던 거 기억나?”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고, 녀석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기를 바랐다.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내가 짓지 않은 이름으로…… 운명이 결정되는 건 부당하다고 했지.”

“맞아. 이름을 바꾸고 기존의 나를 부정하면서 내 안의 훼손되지 않는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고 싶어.”

N이 목장갑을 낀 손으로 여러 번 흙을 퍼서 불꽃을 덮었다. 나는 그 위에 생수를 끼얹었다.

“따라와. 보여줄 게 있어.”

화덕을 그대로 두고 N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현관 정면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방 중앙에 흰 식탁보를 덮은 거대한 원탁이 있었다. 원탁은 방에 비해 몹시 커서 우리는 방 가장자리로 둘러 다녀야 했다. 원탁 위에는 갖가지 잡동사니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싸구려 반지와 귀걸이, 입던 옷가지, 넥타이, 냅킨, 숟가락, 볼펜, 카드지갑, 골프장갑, 허리띠, 화장솜 등등. 그 잡동사니들 위로 우리가 여행에서 쓰다 남은 명함들이 뿌려져 있었다. 나는 한기가 들어 바람막이 앞섶을 여몄다.

“이게 다 뭐야?”

“전리품.”

N이 눈에 익은 물건 하나를 원탁 위로 툭 던졌다. 보라색 넥타이핀. 나는 넥타이핀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원탁을 짚었다. 천천히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이딴 거 없어져봤자 그 사람들은 신경도 안 써.” N이 가벼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왜 가져온 건데?”

“처음에는 재미였지. 근데 모으다 보니 여행을 떠올릴 때 좋더라고.” N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건드렸다. “상상력은 적극적으로 기억을 왜곡시켜. 이것들 또한 여행의 기억에 상상력의 손길을 더해주는 디테일이 될 거야.”

N은 이번 여행에서 쓰다 남은 정서진의 명함을 테이블 위로 한 장 한 장 날렸다. 명함은 가짜 이름을 믿은 사람들을 모욕하듯 그들의 물건 위로 내려앉았다. 아니.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여행하는 동안 나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름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여도 상관없었다.

라이터 부싯돌을 굴리는 소리가 상념을 깼다. N이 담뱃불을 붙였다. “이거 다 태울 거야.”

“태운다고?”

N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씩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