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싸구려 칫솔」 ①
잠이 덜 깬 상태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침대 시트는 차가웠다.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답답하게 얼굴을 데웠다. 고개를 돌리자 옆자리 베개에 희미한 상이 어렸다. 눈에 힘을 줬다. 전날 같이 있던 여자의 머리카락 몇 올이 또렷이 보였다가 다시 흐려졌다. 몸을 일으켜 마른세수를 했다. 블라인드가 살짝 걷힌 창문이 모텔 방에 미명을 들였다. 무덤에서 깨어난 기분. 창가에 다가가 담뱃불을 붙였다. 전날 딴 맥주 캔이 화장대에 그대로 있었다. 마시다 말아 묵직했다. 미지근한 맥주를 한 모금 먹고 캔을 침대 위로 던졌다. 포물선 그리는 실루엣, 후두둑 젖는 이불, 침대 헤드에 부딪힌 맥주 캔을 받아 안고서 소리 없이 젖어드는 침대 시트.
욕조 모서리에 걸터앉아 이를 닦았다. 세면키트의 일회용 칫솔은 조금만 움직여도 뽀득뽀득 불쾌한 소리를 냈다. 욕조 근처에 전날 뜯은 거품입욕제 포장지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거품 속에서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즐거워하던 여자. 숙취로 비현실적이게만 느껴지는 간밤의 기억을 벗겨내겠다는 듯 싸구려 칫솔은 뻣뻣하게 치아를 긁어냈다. 고개 돌려 거울에 비친 쭉정이 같은 얼굴을 쳐다봤다. 이어졌던 몇 번의 여행. 몇 번의 술자리. 되찾을 순 없겠죠, 그래도 소각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석진은 보증을 잘못 서서 가업인 소각장을 날려먹은 부모를 원망했다. 덜떨어진 부모라며 평생 한심해했지만 어느 순간 그들을 기리는 궤적으로 삶이 나아가더라고 덧붙였다. 고향 이야기를 하다 짧은 푸념처럼 섞여든 석진의 이야기는 일행의 동정을 샀다. 나는 석진의 말에서 N의 욕망을 읽었다. 여기에 내 기억을 몰아넣고 태우는 거야, 진짜 나를 알게 되는 순간에. N은 원탁의 방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완벽한 거짓말이란 진실한 욕망에 허구의 서사를 적절히 섞어 완성시키는 것일지 몰랐다. 허나 그렇다면 완벽한 타인이 되고자 하는 N의 의도와는 분명 모순되는 지점이 있었다. 뻣뻣한 칫솔모가 딴 생각과 잇몸 모두에 상처를 냈다. 칫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피 섞인 거품을 뱉어냈다. 여행을 이어갈수록 건조한 바람과도 같은 권태에 정신이 말라드는 기분이었다. 반복되는 자극은 익숙해지고 욕정마저 지루했다. 몸이 달았던 황홀하고 뜨거운 간밤의 순간은 거품처럼 꺼지고 나는 싸구려 칫솔처럼 매일 아침 혼자 버려진다.
샤워하고 담배를 피웠다. 퇴실시간까지 한 시간 가량 남아 있었다. 속이 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젖지 않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잠시 후 N이 호텔 주소를 보내왔다. 나는 대포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셜록이다.
“내가 말한 건 알아봤어?”
“돈은?”
“준다니까. 빨리 말해 봐.”
“네 말대로 N이 매번 그 산장에 가는 건 아니었어.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데가 있더라고.”
“그럴 줄 알았어. 어디로 가던데?”
“음.” 셜록이 뜸을 들였다. “외진 산골짝에 있는 농가야. 지도에는 건물이 안 떠서 뽀리한테 직접 확인하러 가 보라 했으니까 나중에 걔한테도 심부름 값 줘.”
“알았어. 산골짝에 있는 농가…… 거기서 뭘 하는데?”
“그게 궁금했으면 위치추적이 아니라 미행을 붙였어야지.”
“뽀리는 뭐 본 거 없대?”
“알짱거리다 뒈질 일 있냐? 걔도 지나가면서 힐끗 본 게 다야. 우리 이러는 거 N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려.”
“뭔 건달자식이 이렇게 겁이 많아? 걸리면 내가 다 뒤집어쓴다니까.”
“입만 산 새끼. 네가 무슨 수로 뒤집어쓸 건데?”
“그러니까 걸리지 말고 잘해야지.” 나는 웃었다. “다른 건 뭐 없었어?”
“낡아빠진 농가야. 별거 없어. 근처에 다른 집들도 있긴 한데 뚝뚝 떨어져 있고. 동네가 원래 그런가 봐.”
“알겠어. 혹시 오늘 오후에 N 미행 붙일 수 있어? 여행 끝나는 날이라 걔 혼자 움직일 거야.”
“간땡이 비대증 걸리셨으면 병원에나 가시죠, 선생님.”
“붙일 수 있어 없어?”
셜록이 한숨을 쉬었다.
“붙일 수 있기야 하지. 근데 미행 붙여서 뭘 알고 싶은데?”
“응? 음.” 나는 생각했다. “그냥 뭐, 일거수일투족 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새끼 너 아무 생각 없지?” 셜록이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하나만 걸려라하고 뭐든 캐내는 거야?”
“아니 뭐…… 나는 아는 게 너무 없으니까.”
“목적을 알아야 공사를 제대로 칠 거 아니야. N을 털어먹겠다는 거야, 아니면 N의 목줄을 쥐겠다는 거야?”
“뭔 소릴 하는 거야, 뭘 털어먹고 뭔 목줄을……”
“개새끼, 너 아무런 목적도 없어?”
나는 대꾸 없이 눈알만 굴렸다. 솔직히 아무런 목적이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드럼통에 들어갈 분위기였다. 셜록이 먼저 입을 뗐다.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고, 하여간 씨발 둘이 존나 닮긴 닮았다니까.”
“뭐?”
“돈이나 준비해 씨발아. 위치추적 먼저 하고 너랑 N이랑 찢어지면 그때 미행 붙일게.”
“너 나도 위치추적 했냐?”
“내가 시간이 남아 도냐? 멍청한 소리할 거면 끊어.”
“알았어.” 나는 웃었다. “나도 나가봐야 해. 나중에 연락할게.”
“하지 마 이 새꺄.” 셜록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도심지의 호텔로 향했다. 가장자리를 도금한 회전문을 지나자 대리석이 깔린 널찍한 로비가 나왔다. 경계석을 두른 화단에 야자수 두 그루가 있었고, 프런트 왼편에는 루이스 부르주아를 연상시키는 조형물이 있었다. 프런트 직원에게 N의 가명을 댔다. 직원이 룸에 연락을 하더니 호실을 알려주었다.
N이 묵고 있다는 호실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나는 호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조용히 들어갔다.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빛이 들었지만 실내는 어두웠고 술 냄새가 진동했다. N을 불렀다. 대답 대신 이불을 걷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응접실을 지나다 소파 테이블 위 낯선 사물의 실루엣을 보고 멈춰 섰다. 불을 켰다. 술병들 가운데 주사기와 그을린 숟가락, 지포라이터가 흐트러져 있었다. 테이블을 훑자 손가락에 흰 가루가 약간 묻어났다. 나는 곧장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N이 침대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저게 다 뭐야?”
“걔들 뽕쟁이더라.”
“젠장, 어쩐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새끼들 눈까리가 정상이 아니었어.”
N이 일어나 비척비척 욕실로 걸어갔다. 따라가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눈이 풀려 있었다.
“너…… 아니지?”
“뭐가?”
“약 말이야. 너 안 했지?”
“뭐래.”
그가 귀찮다는 듯 힘없이 나를 밀치고 욕실로 갔다. 나는 닫힌 욕실 문과 응접실을 번갈아 쳐다봤다. 정말 하지 않았냐고 소리쳐 물었지만 샤워기 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응접실로 향했다. 우선 휴지를 술로 적셔 테이블을 닦고 마른 휴지로 한 번 더 닦아냈다. 지포라이터는 N의 것이 아니었다. 한번 켜 보고 주머니에 챙겼다. 주사기와 숟가락은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소파에 털썩 앉아 남은 술을 병째 몇 모금 마셨다. N이 마약을 했다면 예삿일이 아니었다.
나는 N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뭉친 휴지를 들고 따져 물었다.
“너 정말 안 했어?”
“무슨 소리야.” N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었다. “옷이나 사러 가자.”
“뭐?”
“한 탕 더 뛸 거야.”
“지금 바로?”
N은 태연하게 화장대로 가 헤어드라이어를 켰다. 휴식기간도 준비기간도 없이 연달아 여행을 한 적은 없었다. 나는 너무 갑작스럽다고, 준비가 하나도 안 됐다고 말했지만 N은 헤어드라이어 소리에 안 들리는 척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휴지나 빨리 변기에 내려.”
N이 헤어드라이어를 끄더니 장난치듯 말했다. 그는 응접실로 가서 숟가락과 주사기를 가방에 챙겼다. 나는 무슨 짓이냐고 했다.
“그럼 두고 가? 밖에다 버려야지.”
나는 휴지를 녀석에게 내밀었다. “너 정말,”
“아니야, 안 했어. 안 했다고.” N이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약을 왜 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버려.”
“그렇지?” 나는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진작 안 했다고 하지, 씨.”
곧장 휴지를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렸다. 손을 꼼꼼히 씻고 나왔을 때 N은 침대에 새 명함들을 뿌리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침대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호텔 일층 브런치 카페에서 커피와 햄에그샌드위치, 야채수프를 시켰다. N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인물노트에 만년필로 무언가를 끼적였다. 한글에는 세필이 낫다며 그는 일제 만년필을 고집했다. 고가의 만년필을 잃어버리면 급한 대로 싸구려 일제 만년필을 사서 썼다. 반면 노트는 다소 비싸고 질 좋은 단 하나의 브랜드만 고집했다. 실용성과 사치 중 어떤 선택을 해도 녀석에게는 심리적 지장이 없었다. 그것이 N의 기질인지 그럴만한 부를 가졌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프를 다 먹어갈 때쯤 N은 숟가락을 쓸 때마다 거울을 닦듯 깔끔하게 빨고 포크와 숟가락을 제자리에 정확히, 흐트러짐 없이 놓았다.
기차는 덜커덩거리며 일정한 속도로 내달렸다. 종점까지 꼬박 네 시간은 더 달려야 했다. 당장 탈 수 있는 기차 중 가장 멀리 가는 것이었다. N은 급한 일이 없다면 자동차보다는 기차를, 그것도 느린 무궁화호 타기를 즐겼다. 그는 기차의 리듬을 좋아했다. 기차의 소음과 흔들림은 수면이나 생각, 풍경 감상 등 어떤 것에도 어울리는 리듬이라고 했다. 좌석에 앉아 인물노트를 살피는 N을 두고 나는 객실을 나서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대포폰에 셜록의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신혼여행이냐? 왜 안 떨어져?
그러니까 말이다, 씨발. 나는 답장하지 않고 대포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볼일을 보고 객실 간 통로에 설치된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기차가 덜컹거리는 대로 몸이 흔들리자 불현듯 열차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뭐든 쉽게 질리는 성미가 병처럼 또 도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루함을 떨치려 N처럼 실존인물을 사칭하는 위험까지는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핸드타월을 물에 적셔 눈두덩을 지그시 눌렀다. N이 연타로 여행을 제안한 것을 보면 그도 슬슬 권태를 느끼는지 몰랐다. 객실로 돌아가자 N은 새로운 인물인 인호의 목소리 톤을 조정하고 있었다.
네 시간 뒤, 종점 하차를 위해 객실 복도에 줄이 이어졌다. 인호 앞에 있던 노인이 캐리어를 들고 낑낑댔다. 인호가 노인의 캐리어를 번쩍 들어 플랫폼까지 가져다줬다. 약간 다리를 절던 노인은 플랫폼에 내려와 페도라를 살짝 벗는 시늉하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인호도 미소로 화답하고 계단을 향해 갔다.
“저분처럼 점잖게 늙어야 하는데.” 내가 말했다.
“일찍 죽는 게 낫지.”
인호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던 그가 순간 휘청거렸다. 재빨리 그를 붙잡아 부축했다. 우리 탓에 행렬에 체증이 생겼지만 이내 사람들은 바위를 둘러가는 물길처럼 양쪽으로 갈려 지나갔다.
“왜 그래?” 내가 물었다.
인호, 아니 N은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이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했다.
“괜찮아?”
나는 녀석의 이마를 짚었다. 선득했다.
“응. 괜찮아.”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부축하던 내 팔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안 좋아 보이는데.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N은 고개를 젓더니 계단 난간을 짚고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올라가고 계단에는 우리뿐이었다. 이윽고 N이 얼굴의 땀을 닦아내더니 나를 향해 돌아섰다.
“쉬면 돼. 쉬러 왔는데 뭘. 어떻게 맞춘 휴간데.”
인호였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계단을 마저 올랐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녀석의 관자놀이에 아직 땀이 맺혀 있었다. 컨디션이 영 안 좋은지 평소보다 불안하고 긴장한 듯 보였다.
기차역 앞 택시 승강장에서 이번 자리는 내가 마련할까 물었다.
“됐어. 한세월 걸리게?” 인호가 창백하게 웃었다. “이따 연락할게.”
인호는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떠났다. 나는 괜스레 주먹으로 뒤통수를 퉁퉁 쳤다. 횡단보도 앞 볼라드에 걸터앉아 주변을 검색했다. 번화가가 기차역과 붙어 있었다. 그쪽으로 가려면 반대쪽 출입구로 나가야해서 다시 역사로 돌아갔다. 대합실을 가로지르다 아까의 페도라 쓴 노인을 마주쳤다. 그는 장의자에 앉아 질질 녹은 아이스크림으로 범벅된 손을 핥고 있었다. 캐리어는 보이지 않았다.
역사 앞 큰길을 건너자 ‘젊음의 거리’라 적힌 아치형 간판이 눈에 띄었다. 거리에는 뚜껑처럼 아케이드가 씌워져 있었다. 인근 주민들과 피서객들로 붐볐고 온갖 상가들은 이목을 끌기 위해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 놓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 매장 앞에서 추첨권을 나눠 주는 직원들을 지나쳐 피자집에 들어갔다. 코끼리 얼굴만 한 피자 두 조각과 맥주를 시켜 먹었다. N은 여행 중에 내게 술이나 진한 커피를 가볍게 한잔하고 술자리에 합류하기를 권했다. 워낙에 재미없는 인간이라 들뜨게 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공연한 반항심에 술과 커피를 마시지 않는 캐릭터를 잡은 적도 있었지만, 결국 N의 말을 따를 때 여행이 좀 더 재밌어졌다. 아파 보이던 N에 대한 걱정은 가라앉고 이유 모를 환멸이 헛구역질처럼 쏠렸다. 전에 없이 창백한 안색과 식은땀을 흘리던 녀석에게서 마약을 했으리라는 심증을 지울 수 없었다. 단순히 스릴을 좀 더 즐기기 위해 여행 일정을 연달아 잡았다고는 하지만 그 충동적인 결정에 마약의 영향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대형서점에 들러 뇌과학과 정신건강의학 관련 교양서적 몇 권을 뒤졌다. 내가 새로 맡은 인물 서규찬은 정신건강의학을 전공하고 현재 중독치료센터에서 일하는 의사였다. 책장을 넘기던 나는 식곤증 때문인지 못내 집중력이 떨어졌고, 사전에 준비한 내용만으로 잘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서점을 나서서 아케이드 아래를 걸었다. 번화가는 기차역에서 해안까지 이어졌다.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보도블록에 모래가 늘었고 수영복에 남방을 걸친 사람들이 많아졌다. 해변 어귀에 다가서자 아케이드와 건물들로 가려져 있던 시야가 확 트이며 피서객들로 꽉 찬 해수욕장이 보였다. 징그럽게 많은 사람들을 보자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해변 한쪽에 바다로 곧게 뻗은 잔교로 향했다. 둥글게 마감된 끄트머리에 빨간 등대가 세워져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등대 아래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잔교 가장자리에 설치된 난간 가까이 다가섰다. 뙤약볕이 바다의 소름 돋은 살결을 눈부시게 쓰다듬었다. 눈을 찌푸리며 바다를 보다가 주머니에서 약쟁이의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불을 켜 본 뒤 다시 닫았다. 짤깍하며 자석이 붙듯 빠르고 무겁게 닫혔다. 바다에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와 얼굴과 머리칼을 스쳤다. 왠지 모르게 후련하고 근사한 기분이 들었고, 그런 느낌을 인지하자마자 기분이 형편없어졌다. 뒤돌아 등대를 지나치려는데 연인인 듯 보이는 두 사람이 쭈뼛거리며 다가와 혹시 사진을 찍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하는 것도 귀찮았다. 두 사람이 휴대폰을 건네고 서둘러 등대로 달려가 포즈를 취했다. 나는 익살맞은 심술이 올라 전면 카메라로 전환하여 셀카나 찍어 버릴까 싶었고, 그러자 난데없이 포니테일과 함께 찍었던 사진이 떠올랐다. 얌전히 그들의 사진을 찍고 휴대폰을 돌려줬다.
“감사합니다. 저희도 사진 찍어드릴까요?”
“됐습니다.”
나는 뒤돌아서 뭍으로 향했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는데, 씨발, 그들의 비웃음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맥주 한 병을 사서 해변으로 향했다. 모래사장에 박스 하나를 깔고 앉아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한 아이가 물가에 앉아서 양동이에 모래를 가득 담고 있었다. 나는 N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확실히 의심할 것은 없었다. 단지 실낱같은 의구심이 시간이 지날수록 솜사탕처럼 몸집을 키웠다. N이 여행의 이유와 목적이라고 댄 그의 철학은 실험가를 참칭하는 어린아이의 야심 같았다. 만약 내가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우리 여행의 진상을 떠벌린다면 어떨까. 저희는 가짜 명함을 들고 가짜 신분을 내세우며 여행하고 있어요.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사기꾼은 맞지만 피해자는 없어요. 그럼 사람들은 그게 말이 되냐고 되물으며 웃을 것이다. 그게 코미디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실현할 능력과 경제적 기반이 N에게 있다는 것이. N은 실수를 걱정하기는커녕 여행에 변수를 만들어내며 즐겼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껏 기획하고 실행하는 N에게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맥주를 마셨다. 여행이 지겨웠지만 여행을 벗어난 내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낙관의 잎이 지껄인 대로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어떻게든 살아있기는 한데 어떻게 살 수 있을지는 여전히 막막했다. 진실은 아주 단순하고도 냉엄했다. 나는 내 삶을 낙관한 적은 있지만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믿어 본 적은 없었다.
물가의 아이는 양동이에 모래를 퍼 담고 이따금 손으로 꾹꾹 눌러 단단히 다졌다. 모래가 다 채워지자 아이는 양동이를 빠르게 뒤집은 뒤 조심스럽게 살살 돌려 빼내기 시작했다. 파도가 밀려와 조그만 발을 간질일 때마다 모래 묻은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모래성은 귀퉁이 한쪽이 약간 부서져 있었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모래성을 대차게 밀어 무너뜨렸다. 그리고 다시금 양동이를 채우기 시작했다. 아이를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문자 메시지 알림이 떴다. 인호였다. 술병을 챙겨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