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30화

3부 「싸구려 칫솔」 ②

by 윤아무개

단층의 세계맥줏집은 해변을 마주하고 있었다. 술집 가까이 다가갔을 때 테라스에 앉아 있던 인호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녀석과 동석한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가볍게 손짓하고 술집에 들어가 홀을 가로질러 테라스로 나갔다.

“제 친구 규찬이에요. 서규찬.”

인호가 일행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는 미용실에라도 다녀왔는지 낮과 다른 헤어스타일에 안경을 끼고 있었다.

“반가워요, 규찬 씨. 이 새끼 진료 좀 봐주세요.” 남방셔츠를 입은 여자가 풍채 좋은 남자를 가리켰다.

“취했냐?” 남자가 팔꿈치 안쪽을 긁으며 말했다.

“아니.”

“그럼 미친 거지?”

“사람 세워 두고 뭐하는 거야.” 다른 여자가 말했다. “자리 좀 빼드려.”

남자와 남방셔츠를 입은 여자가 의자를 당겨 사이를 벌렸다. 나는 가볍게 인사하고 빈 테이블에서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분위기는 좋아 보였다.

최근 본 영화에서 연애와 결혼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갔다. 인호는 대화가 어색하게 끊이지 않도록 적당한 지점에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다 적당한 타이밍이 오면 자기 이야기를 풀었다. 그의 말재간은 주변사람들을 한낱 소품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그 재주는 인호의 것이 아니라 N의 것이었다. 내가 맥주 한 병을 비우자 풍채 좋은 남자가 그냥 있으라는 손짓을 보이더니 슬그머니 나서서 맥주 서너 병을 꺼내왔다. 그는 맥주병을 따서 내게 건넸다. 나는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남자는 술자리 내내 병따개를 놓지 않고서 모두의 술병을 따줬다.

“저는 결혼은 할지 몰라도, 애는 안 낳을 것 같아요.” 남방셔츠를 입은 여자가 말했다.

“현명해. 네가 애 키우면 아마 뉴스에 나올걸. 바로 매장이지.” 병따개가 목 긋는 시늉을 하며 낄낄거렸다.

“미친놈인가.”

“저는 결혼 생각도 없어요. 좋은 남편도 좋은 아빠도 될 자신이 없어서.” 인호가 말했다.

“자신이 없기는요. 형님 같은 분께서는 결혼할 필요가 없는 거죠. 혼자가 최곱니다.”

혀를 꼬리마냥 살랑대는 병따개 탓에 기분이 언짢았다. 남방셔츠를 입은 여자가 술을 다 마시자 병따개가 또 한 병 따서 건넸다.

“암튼 변호사에 의사에, 두 분 다 진짜 대단하셔요.” 남방셔츠를 입은 여자가 나와 인호를 번갈아보더니 옆에 앉은 여자를 가리켰다. “얘도 변호사 준비해요.”

나는 인호에게로 가는 시선을 의식적으로 멈췄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먼저 예비 변호사를 흥미롭다는 듯 쳐다본 뒤 인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예비 변호사는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정정했다. 그게 그거지, 남방셔츠를 입은 여자가 말했고 병따개는 역시 우리 엘리트라며 예비 변호사에게 병을 하나 더 따줬다.

“인호 오빠는 로스쿨 나왔어요?” 남방셔츠를 입은 여자가 물었다.

“그럼 뭐 피자스쿨 나왔겠냐?” 병따개가 면박을 줬다.

인호가 눈썹을 찡긋거리며 접시의 각도를 다시 잡았다. “저는 사법연수원 출신입니다.”

“로스쿨이랑 다르나요?” 병따개가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하진 않은 것 같았다.

“사법고시 보셨나 봐요.” 예비 변호사가 입을 뗐다.

“네. 폐지되기 몇 년 전에 패스했죠.”

예비 변호사는 자기 앞에 놓인 인호의 명함을 손으로 살짝 당겼다. “좋은 데 다니시네요.”

“유명한 데야?” 남방셔츠를 입은 여자가 물었다.

예비 변호사는 그렇다며 명함을 다시 밀어냈다. 김인호라고 검색해 보세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저는 민사 쪽으로 가고 싶어요.” 예비 변호사가 고개를 들며 강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하. 저희 로펌은 형사소송 전문이라.” 인호가 덧붙였다.

“형사소송이요? 무섭지 않아요?” 남방셔츠를 입은 여자가 무릎을 접어 양발을 의자 위에 올리고 팔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미친 사이코들 많죠?”

“글쎄요. 강력범죄를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금융범죄 대응팀이라.”

“사이코는 규찬 형님이 더 잘 아시지 않을까?” 병따개가 또 하이네켄을 따서 내게 건넸다. “낮에도 논문 쓰신다고 바쁘셨다면서요.”

나도 모르는 각본. “그랬죠.”

“어떤 논문이에요?”

“살인범들의 반복적인 살인 충동에서 정신병리적 중독 구조를 해석하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렇게나 지껄이며 기본안주로 나온 미니 프레즐을 집어 먹었다. 예상치 못한 와사비 맛이 혀를 찌르르 스쳤다. “이거 맥주 안주로 딱이네.”

“살인범이요? 직접 만나시는 거예요?” 남방셔츠를 입은 여자가 흥미를 보였다.

“만나는 경우도 있죠. 기존의 연구 자료를 이용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교도소에서 만나요?”

병따개가 혀를 찼다. “골 빈 소리하네. 살인범을 교도소 밖으로 꺼내겠냐?”

“꺼내기도 하죠. 드문 일이지만 제 연구실에서 보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개소리였고 쓸데없는 소리였다. 번번이 남방셔츠 입은 여자를 면박해대는 병따개가 꼴 보기 싫어 뱉은 말이었다. 그러니 이건 규찬이 아닌 내가 한 말.

“그럼 쫄리지 않아요?” 병따개가 물었다.

“연구 대상자일 뿐인데요 뭘.”

“배짱 좋으시네. 혹시 우리가 아는 살인범들도 만났어요? 막 뉴스에 나오고 그런 범죄자들?”

나는 입술을 말아 넣고 대답하지 않았다. 병따개는 뭐가 신나는지 계속 지껄였다.

“아님 중독치료센터면 환자 중에 사고 치는 인간들도 많지 않아요? 회까닥해서 막, 응?”

나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미니 프레즐 그릇을 집어 병따개 앞에 탁 놓았다.

“안주가 필요하면 이걸 먹어요. 더 갖다 드릴게.”

병따개가 잠깐 무슨 말인지 생각하는 듯하더니 동행들의 얼굴을 살폈다.

“저희 일이 안주거리 삼아 떠들기 적당하지 않아요. 민감한 문제들이 많아서.” 인호가 분위기를 풀려는 듯 말했다.

“그렇겠죠. 에이, 에이.” 남방셔츠를 입은 여자가 눈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야, 니가 물어본 것도 의사쌤한테는 다 일 얘기야. 다른 얘기해요, 우리.”

“네가 먼저 물었거든?” 병따개가 발끈했다.

“저 의사 아닙니다.” 내가 성가시다는 듯 쏘아붙였다. 다들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관광객이에요. 오늘은.”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화장실로 향했다. 빌어먹을 병따개가 맥주를 얼마나 먹이는지 온몸이 오크통이 된 기분이었다. 자리로 돌아가니 병따개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애피타이저로 나온 빵이 맛있어 계속 리필해 먹다가 메인디시를 남겼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모두 웃었다. 나는 따분하고 시답잖은 대화에서 한발 빠졌다. 고개 돌려 하품하면서 테라스 너머를 보았다. 도로 끝에서 중년 남자 세 명이 도베르만 한 마리씩을 데리고 산책하고 있었다. 두 마리는 빨간 목줄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목줄 없이 도로를 어슬렁거렸다. 행인들이 위협을 느낄수록 개 주인은 보란 듯이 더욱 거드름을 피워댔다. 목줄 없는 개가 테라스 근처에서 멈추더니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눈으로 개의 시선을 좇았지만 너무 낮아 보이지 않았다. 개 주인이 태연하게 로키, 하고 부르며 휘파람을 불었다. 개가 주인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서규찬!”

나는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인호가 물었다.

“이름.”

“뭐?”

“개 이름이 로키래.” 나는 왼손 엄지로 길가를 가리켰다. “방금 지나간 도베르만.”

“로키? 토르, 오딘, 그 로키?”

“마블 영화 팬이신가 보다.” 남방셔츠 입은 여자가 말했다.

“로키 너 별명이었잖아.” 예비 변호사가 반가운 추억이 떠오른 표정으로 남방셔츠 입은 여자를 봤다.

“맞아. 로키가 내 이상형이고 롤 모델이었는데.”

“두 분 대학 동기라고 하셨죠?” 인호가 물었다.

대화는 로키와 예비 변호사의 대학 추억들로 이어졌고, 인호는 그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 몰두했다. 병따개는 술을 더 꺼내올 요량이었고, 나는 맥주가 물려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술집이 단층이라 나가서도 그들의 이야기가 들렸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담뱃불을 붙였다. 기분이 별로였다. 연이은 여행의 여파일지 몰랐다. 병따개의 수고 또한 마뜩찮았다. 술심부름을 자처하는 척 우리를 단단히 호구 잡으려는 심보가 훤했다. 해가 완전히 떨어져 어두운 해변에서 누군가 불꽃놀이 폭죽을 쏘아 올렸다. 담배를 깊이 빨며 미간을 찌푸리고 불꽃에 초점을 맞췄다. 스파클라, 등신아. 불붙이면 스파크 튀는 철사.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부르는 목소리. 목소리가 부르는 얼굴들.

“오빠, 줄담배 피워요?” 로키가 테라스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빨리 들어와요. 우리 어디 갈지 정하고 있어.”

“금방 가요.”

담배를 급히 피우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홀을 지나려는데 테라스에 인호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저 자리에 끼고 싶지 않아 화장실로 향했다. 소변을 보고 손을 씻은 뒤 홀로 나서다 예비 변호사와 마주쳤다. 그는 어정쩡하게 목례를 하고 지나쳤다.

테라스에는 병따개와 로키뿐이었다. 인호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고 했다. 병따개가 눈치를 보다 맥주 한 병을 더 땄다.

“인호 형님이 보기보다 시원시원하더라고요.” 그가 술병을 내게 내밀었다. “첫인상은 뭔가 꽉 막혀 보였는데.”

“재미있는 애죠.” 나는 술병을 건네받으며 대꾸했다.

“형님, 그 혹시……” 병따개가 은밀한 이야기를 하듯 자세를 고쳐 잡았다. “중독치료센터에서 일하시면 약 같은 것도 쉽게 구할 수 있어요?”

나는 맥주를 마시려다 말고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로키가 흥미로워하는 미소를 머금고 의자에 접어올린 무릎을 살짝 더 끌어안으며 턱을 괴었다.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궁금해서요. 이런 걸 의사쌤한테 물어보지 누구한테 물어봐요?”

“의도가 있어 보여서.”

“아이, 날 세우지 마요. 아까 낮에 인호 형님이 언질도 주셨는데.” 병따개가 한쪽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리며 건들거렸다.

“인호가요?” 나는 병따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뭐라고 하던데요?”

“그냥 뭐…….”

병따개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채 입을 다물었다. 내 패를 까기 전까지 입을 열지 않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내 손에는 패가 없었다. 아니, 나 홀로 화투짝을 들고 포커 테이블에 낀 기분이었다. N의 의중을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아까부터 병따개가 습관적으로 긁던 팔꿈치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른손으로 왼손 주먹을 감싸 쥔 뒤 손등을 톡, 톡, 두들겼다.

“좋아요, 나도 뭐 하나 물어봅시다. 대답하면 나도 알려줄게요.” 내가 말했다.

“뭔데요?”

“댁이 처음 만난 사람이랑 친구가 됐어요. 같이 놀다가 그 사람이 묵는 호텔에 가서 약까지 빨았고. 그리고는 아침에 당신 혼자 흔적을 치우지도 않고 호텔을 빠져나가요. 말이 돼요?”

“나 혼자 호텔에서 나온다고요?”

나는 그렇다는 눈짓을 보였다.

“글쎄요.” 개새끼가 보란 듯 팔꿈치 안쪽을 긁으며 미소 지었다. “약을 안 해 봐서 모르겠네.”

“가정이라도 해 봐요.”

“그럼 뭐……. 안 될 게 있어요? 같이 약 빨았으면 남은 사람이 알아서 뒷정리하는 거지.”

“방 주인이 약을 안 했다면?”

병따개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초면에 약 안 하는 인간이랑 한 방에서 약 빠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요?”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냥 가는 거다?”

병따개는 그렇다는 뜻으로 눈을 감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제 대답해주세요, 형님. 약 쉽게 구할 수 있죠?”

그때 예비 변호사가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병따개 앞에 두었다.

“필요하면 찾아와요. 치사량으로다가 처방해 줄 테니까.”

병따개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 쳤다. “이 형님, 아까부터 말투가,”

“말투가 왜? 띠껍냐?” 나는 벌떡 일어났다.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인호한테 먼저 갔다고 전해줘요.”

“얘기하다 말고 어딜 내빼? 어?”

병따개가 일어섰다. 로키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예비 변호사는 상황을 파악하려 눈치를 보는 듯했다. 나는 빙글빙글 웃었다.

“호구 잡혀줬으면 알아서 기는 게 도리야, 등신아.”

“간땡이 부었나, 씹새끼가.”

“간땡이 비대증이다 씹새야. 성질도 돈 있는 놈이나 부리는 거야.” 나는 출입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인호한테 붙어먹으려나 본데, 쟤가 뭐가 아쉬워서 떨거지 같은 네 뒤를 봐 주겠냐? 주제 파악을 좀 해. 닥치고 얌전히 놀아.”

“개새끼가.”

“왜? 덤비게? 하여간 이런 등신은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요.”

이판사판이다. 경찰서나 병원에 가면 실명을 까야할 테고, 내가 의사가 아니라는 것도 밝혀지겠지만, 나한테는 돈이 있다. 아무리 큰 명함이라도 지폐 한 장 아래 너끈히 가려진다. 뛰놀던 무대가 박살날 때 드러날 N의 얼굴도 볼만하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칠 거야 말 거야? 뭐 예쁘다고 계속 보고만 있어.” 나는 비웃으며 테이블 위에 둔 휴대폰을 챙겼다.

“야, 놔 봐.”

병따개가 씩씩거렸다. 풍채 좋은 놈이 로키의 가는 손에 붙잡혀 있다는 게 우습지도 않았다.

“웃어, 씨발놈아.” 내가 말했다. “돈은 내가 내는데 왜 네가 죽상이야?”

그래도 병따개는 덤비지 않았다. 싱거웠다. 나는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치렀다. 테라스에서는 뒤늦게 쫓아 나오려는 병따개를 다른 두 사람이 말리고 있었다. 저래야 덜 쪽팔리겠지. 술집 앞에서 N을 마주쳤다.

“뭐하자는 거야? 약쟁이랑 엮여서 뭘 어쩌려고?”

“무슨 소리야?”

그가 검지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되물었다. 인호를 벗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됐다. 난 간다.”

나는 그를 지나쳐 거리로 나섰다. 성난 채로 몇 걸음 걷다 문득 이래도 되나 생각했다. 이제껏 노는 무리가 갈려 헤어진 적은 있어도 독단적으로 빠져나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인호는, 아니 N은 잡지 않았다. 도로를 건너 방파벽을 따라 걸었다. 해 저문 해변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티백이 뜨거운 물에 우러나듯 여름밤의 여유에 들뜬 흥분이 퍼져가고 있었다. 순간 쓸쓸해졌다. 여행객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조명처럼 나의 공허를 비추는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에 휩싸인 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서규찬을 부르며 달려왔다.

“규찬 씨.” 예비 변호사였다. “규찬 씨라 불러도 되죠?”

나는 그러라고 했다. 예비 변호사가 몸을 숙여 무릎을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과드리러 왔어요. 저 사람이 너무 무례했죠?”

“괜찮아요. 저도 예의 차리진 않았으니까. 괜히 자리를 망쳐서 죄송하네요.”

“아녜요. 규찬 씨 휴가를 망쳐서 저희가 죄송하죠.”

나는 씁쓸하게 웃다가 입술을 매만지고,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오지랖이긴 한데, 변호사 되실 분이 약쟁이랑 어울려서 어쩌려고 그러세요? 잠재고객 뭐 그런 거예요?”

내가 농담조로 말하자 그도 웃으며 질색을 했다.

“아니에요. 사실 안 지도 얼마 안 됐고 저는 솔직히 맘에 안 드는 사람이거든요. 요즘 저 인간이 제 친구를 따라다녀서……. 솔직히 규찬 씨가 욕해주셨을 때 내심 후련했어요.”

나는 힘없이 웃었다.

“인호는 어쩐답니까?”

“같이 마저 노실 모양이에요. 제 친구가 인호 씨를 맘에 들어하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더라고요.”

“죄송해요, 저희가 괜히 껴서……”

“괜찮습니다. 하룻밤 푹 쉬죠 뭐.” 나는 예의를 갖춘 미소를 지었다. “그럼 즐겁게 노세요.”

“전 안 놀아요. 그냥 나왔어요.”

“그래요? 왜 더 노시지 않고?”

예비 변호사는 병따개와 놀고 싶지 않다며, 자신도 로키와 둘이 놀 생각으로 나왔던 것이라고 했다. 예비 변호사가 먼저 내가 가던 방향으로 발길을 뗐다. 나는 그와 나란히 방파벽을 따라 걸었다. 바다에서 습한 바람이 밀려왔고 어딘가에서 고기 탄 냄새가 났다. 별로 할 말이 없어 어색한 침묵만 잇따랐다.

“집에 가시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좀 전에 막차가 끊겼어요. 택시 타기도 좀 애매해서 첫차 뜰 때까지 기다리려구요.” 예비 변호사는 민망한지 농담처럼 한 마디 덧붙였다. “아침이면 해무도 볼 수 있어요.”

그럴 바엔 친구랑 같이 노시지, 라고 말하려다 돌림노래가 될 것 같아 말았다.

“안 피곤하겠어요?”

“하룻밤쯤이야 거뜬해요. 규찬 씨는 어디 갈 데 있어요?”

“여행이니 발길 닿는 데로 가야죠 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생각해놓은 데는 없어요.”

“괜찮으시면 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 저도 이 근처는 잘 모르긴 한데, 좋은 술집 한 군데는 알거든요.”

“좋은 술집 한 군데면 충분하죠.”

예비 변호사가 씩 웃으며 앞장섰다. 뒤따라 걷자니 어쩌면 이럴 줄 알고 N이 나를 잡지 않았나 생각했다. 예비 변호사는 번화가 끝자락에 있는 펍으로 나를 데려갔다. 펍은 지하에 있었고, 라운지 테이블 없이 사면 벽을 따라서 바 테이블만 놓여 있었다. 중앙은 무대로 쓰이는 낮은 단상이 꾸려져 있었다. 우리는 출입문에서 가장 멀리 있는 구석자리의 스툴을 빼 앉았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왔다. 나는 마티니를, 예비 변호사는 조니 워커 블랙 라벨 온더록스를, 안주로는 생크림을 얹은 딸기와 모듬 치즈를 시켰다.

“여기 오면 남들이랑 눈을 마주치지 않아서 좋아요.” 예비 변호사가 말했다.

“그러네요. 비싼 돈 주고 벽과 마주하다니, 영광이에요.”

“왜 벽을 봐요?”

예비 변호사의 말에 나는 작게 웃었다. 스피커에서 재즈풍의 음악이 들려왔다.

“재즈 좋아하세요? 저는 좋더라고요. 제대로 아는 곡은 없지만.” 예비 변호사가 리듬에 맞춰 고개를 살짝살짝 흔들었다. 그의 발도 테이블 아래서 까딱거리고 있을 것 같았다.

“좋아해요. 아는 곡이 없는 것도 같고요.”

종업원이 술과 안주를 내왔다. 건배를 하고 한 모금씩 마셨다. 예비 변호사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아까 맥줏집에서 재미 없으셨죠?”

나는 무슨 얘기냐고 되물었다.

“내내 표정이 안 좋으셔서요.”

“아아.” 내가 그랬나. “종일 기분이 안 좋았어요. 피곤하기도 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원인을 찾으려 해도 엉망으로 엉킨 실타래처럼 잡아당길 끄트머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예비 변호사가 왜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왜 그럴까 계속 생각하다 보니 표정이 안 좋았나.”

“정신분석학적으로요?”

나는 멀뚱히 그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정신분석학적으로.”

“솔직히 규찬 씨랑 친구 분이 부러웠어요. 번듯한 사회인 같아서.” 예비 변호사가 문고리를 돌리듯 술잔 윗부분을 잡고 돌렸다. “아까 친구 분이 건넨 명함, 차마 받질 못하겠더라고요. 웃기죠?”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작은 부채감을 느꼈다. N은 여행 중에 공연한 죄책감 따위는 갖지 말라고 연거푸 말해왔었다. 어쩌면 죄책감 따위는 정말 없는지도 몰랐다. 다만 내 허영은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위스키를 아껴 마시는, 그리고 그것을 티내려하지 않는 여자의 좌절에 빚지고 있었다. 빚을 갚을 방법이라고는 오늘 하룻밤 좋은 걸 먹고 마시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예비변호사가 물었다. 여행 중인 내게 할 만한 질문인지 가늠하던 사이에 그가 말을 이었다. “여행 말고요. 왜 이따금,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으세요?”




안녕하세요, 『TRICK OR TRIP』 작가 윤탐입니다.

브런치북 권당 연재 편 수가 30편으로 제한되어 있어, 다음 내용은 『TRICK OR TRIP』 '하'로 이어집니다. 완결까지 재미있게 봐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