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기타 Jan 14. 2024

태화강 백 리 길을 거닐다 2

반구대 

반구대 암각화

  중학교 졸업 후 서울의 부모님과 합류했다. 동작동 국립현충원과 가까운 흑석동이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전라도 광주가 고향인 주인집 아주머니가 ‘아이고, 어서 오너라, 울산에서 왔으니 고래고기 많이 묵었겠네’ 하며 반겨주셨다. 서해에서도 고래가 잡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식문화가 달랐기에 잡은 고래를 수요가 많은 장생포, 부산으로 보냈다는 호남분들도 고래 하면 울산을 떠올릴 정도로 고래는 울산의 상징이었다. 

  인류 4대 문명 발상지가 모두 강 유역이다. 태화강 유역에도 그 옛날 상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상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대곡리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이 그것이다. 고래가 상징인 고향에 조상이 남긴 인류 최초의 고래사냥 그림이 새겨진 암각화를 아직 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반구대를 찾은 것이다. '발걸음 에세이' 연재 소식에 50년 지기가 안내를 자청하였다. 암각화가 있는 대곡리 인근의 봉계리가 고향인 절친한 퇴직 동료다. 경산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벼운 아침 식사 후 출발했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많아 영남의 알프스라는 지역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신라의 화랑들이 심신 수양과 단련을 위해 찾아다녔을 만한 산세라 생각되었다. 인가와 차량 통행이 드문 산길을 한 시간여를 달려 반구대 표지판이 서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암각화까지 걸어오는 도중 대곡천 암반에 선명히 남아있는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 공룡의 발자국 화석을 만져보며 조상님께 다가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하였다.

      

■ 암각화에 새겨진 조상님의 지혜

  암각화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린다.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았던 칠천 년 전 조상님의 흔적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설렘이었다. 마침내 반구대 암각화 건너편에 섰다. 문화해설사(고명숙 님)의 암각화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암각화는 높이 4m, 넓이 8m(실측 기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에 이르는 수직 암벽에 총 300여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세계 최초의 고래사냥 그림과 46점의 고래 그림이 종류별로 묘사되어 있다. 또 고래사냥 모습과 단순한 식량자원 이상으로 그들의 토템(Totem)인 고래를 암벽에 새겼다. 부족 집단이 살아가는 데 절대적 식량자원인 고래였다. 사냥한 모든 종류의 고래 모습을 새겨 부족의 삶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 고래의 영혼을 위로하고, 다음 생에도 다시 찾아와 주길 바라는 그들 나름의 의식과 의례를 집전하는 샤먼(Shaman)의 모습도 새겨 놓았다. 여름철에는 오후 네 시 경 암각화에 음영이 생겨 암각화를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디지털 망원경으로 암각화를 살펴보며 의문이 생겼다. 왜 연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에 그림을 남겼을까? 그때는 이곳이 바다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을까, 지각 변동으로 바다가 융기하여 고래사냥이 어려워지자 수렵과 농경 생활로 삶의 방식을 전환하고 이곳에다 고래 그림을 새긴 것인가, 암각화 오른쪽의 산짐승, 들짐승 같은 동물 그림은 그래서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해설사님의 설명으로 의문은 풀렸다. 


  ‘암각화가 그려진 암벽의 주변 자연환경 때문이다. 암각화 위로 처마처럼 앞으로 5m가량 튀어나온 암반(지붕돌)이 비바람과 눈보라를 막아주기에 그 아래 암벽에 그린 것이다. 또 수직 암반과 지붕돌이 만나는 지점의 하부가 약간 안쪽으로 들어간 구조다. 그곳에서 말을 하면 공명현상으로 건너편에서도 말소리가 잘 전달되어 이곳을 신성시 여겼다.’ 문자가 없던 시절 중요한 식량자원인 고래의 모습과 고래사냥에 대한 지혜와 방법, 고래잡이의 풍어와 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 등을 후대에 전해 주고자 먼 이곳까지 찾아 그림을 새긴 조상에게 경의를 표했다. 202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준비 중인 이 귀한 유적이 여름철 집중호우 시 4.6Km 하류에 있는 사연댐의 수위(수문이 없어 53m 수위부터 잠기기 시작하여, 57m 이상이면 완전 침수)에 따라 일부 또는 전부가 물에 잠긴다고 했다. 수천 년을 내려온 귀한 유산이 앞으로도 온전히 보존되는 방안이 빨리 마련될 수 있길 소망하였다. 암각화를 배경으로 몇 장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은 후 고래를 찾아 고래잡이의 본향인 장생포로 향했다.  

    

■ 고래의 추억과 장생포

  비릿한 포구 특유의 내음이 코끝에 스친다. 모두가 힘들었던 60년대도 장생포 사람들은 고래가 있어 적어도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5, 6학년 무렵이었다. 동네 어른들을 따라 장생포에 갔다. 도착 후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수평선에 뱃고동을 울리며 포구로 들어오는 배가 보였다. 뱃고동 소리에 사람들은 '고래 잡았다' 소리치며 우르르 포구로 몰려갔고 우리 일행도 뒤따라갔다. 포구와 가까워질수록 포경선은 뱃고동을 거푸 울려댔다. 배마다 다른 뱃고동 소리에 남편이 타고 나간 배임을 단박에 알아차린 아낙네들도 포구로 뛰어나갔다. 포구에 도착한 포경선 뒤로 쇠 작살이 등에 꽂혀있는 고래가 있었다. 초가집 지붕 크기에 길이는 포경선보다 더 길어 보였다. 뭍으로 끌어 올려진 고래는 바로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사용하는 장비는 의외로 단순했다. 고교 시절에 읽은 ‘삼국지’ 관운장의 청룡언월도 마냥, 긴 칼자루에 날이 선 칼이 전부였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칼이 닿는 부위마다 그냥 쩍하고 갈라졌다. 해체된 고래는 무게를 단 후 식당 주인과 상인들에게 넘겨지고, 고기를 받은 사람들은 몇 차례 더 집과 해체장을 바쁜 걸음으로 오갔다. 60여 년 전 보았던 장생포 고래에 대한 유일한 추억이다.  

    

■ 고래와 고래고기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면 볼거리가 많았다. 각종 채소와 과일 등의 농산물과 다양한 종류의 수산물을 구경하는 재미 외 시끌벅적한 활기찬 분위기도 좋았다. 고래고기를 파는 좌판은 늘 발걸음을 붙든 곳이다. 됫박 크기로 삶아진 고기를 함지박에 삼베 보자기로 덮어두고, 작은 덩어리 몇 개를 좌판 위에 올려놓고 손님이 원하는 부위를 썰어 팔았다. 고래고기는 내장 부위를 최고의 맛으로 쳐 가장 비싸고 부위별 맛이 달라 열두 가지 맛이 있다고 했다. 고기는 식용으로 뼈와 수염은 공예품 재료, 기름은 식용 외 윤활유, 가로등을 밝히는 연료, 비누 등의 재료로 사용되어 그야말로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수확물이었다. 

  어느 해인가 추석빔으로 얻어 입은 자주색 코르덴 바지를 입고 놀다 친구와 시장에서 고래고기 오십 환 어치를 샀다. 신문지에 싼 고래고기를 주머니에 넣고 한 점씩 꺼내 먹으며 놀다 해거름에 집에 갔다. 바지 주머니 겉으로 손바닥 크기의 고래고기 기름이 배어 나온 모습에 어머니에게 새 바지 버려놓았다고 야단맞기도 했다. 그만큼 고래고기는 울산사람에겐 기호식품으로 좋은 먹거리였으나, 외지인에겐 특유의 향과 기름기로 친숙하기 쉽지 않은 음식이었다.


  강릉 근무 시절 관할지역 내 국내 제일의 명태잡이 거진항이 있었다. 북한과 지척인 곳이다. 거진읍에는 이북 출신의 실향민이 많았다.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임시 정착하셨던 분들이다. 그분들은 명태가 풍어일 때 ‘아이들은 만 원짜리를 들고 다녔고, 동네 강아지도 천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 했다. 장생포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해방 이후의 고래잡이 전성기 때는 물론 고래잡이가 금지되기 전까지 고래잡이가 호황을 누릴 때면 동네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고 했다.

      

■ 장생포 추억, 가슴에 묻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어릴 적 장생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수많은 공장과 하늘 높이 솟은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쉼 없이 피어오른다. 그 시절 고래가 장생포를 먹여 살렸듯, 저 굴뚝의 하얀 연기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추억 속의 장생포가 사라진 아쉬움을 달랬다.

  모노레일을 타고 고래문화마을, 울산대교, 장생포 일대의 전경을 감상한 후 고래마을 촌장(김영문)님의 안내로 장생포의 옛 모습을 재현한 고래문화마을을 둘러보았다. 고래잡이 장비와 고래 해체 도구, 고래 처리장, 고래기름 착유 및 저장소 외 초등학교 교실 풍경, 말뚝박기 등의 아이들 놀이 모습과 그 시절 거리에 있던 상점, 다방, 우체국, 사진관, 분식점 등의 모습에 잠시나마 그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촌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고래문화마을을 나와 장생포의 마지막 일정으로 지금은 멸종 위기에 처해 국제적 보호 대상 동물로 지정된 과거 울산 앞바다에 자주 출몰했다는 귀신고래의 흔적을 찾아 고래박물관으로 향했다.

반구대 암각화


매거진의 이전글 태화강 백리길을 거닐다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