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을 위하여
구향순
누가 시간밖을 걸어왔는지
어둑하던 집안이 환하게 밝습니다
진열대 위에 곰살궂게 등 밝힌
보리수 술 한 병
우리 살아가는 것도 이처럼
맛 좋고 빛깔 좋은
술 한 병 빗는 일인가 봅니다
노동의 소금에 낭만의 별도 조금 따 넣고
고조된 신경전엔
아이들 웃음소리도 가미하고
그러다가, 아하 하마터면
파열될 뻔했던 감정의 경계에서
한 번 더 꾹 눌러 참고
마침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오만함
제풀에 누그러져 그윽해지면
비로소 맑게 걸러진
진심 어린 눈물 한 방울
사람은 그 후에야 중얼중얼 가벼워져서는
슬그머니 시간 밖을 걸어가는 겁니다
약간의 아쉬움만 남기고 스러지는
저 붉은 노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