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을 할 거면 확실하게! 덕후가 되어라
팀장님의 대답은 간단명료하였다. '그냥 면접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확신이 들었어요'. 면접, 내 삶을 바꾼 순간은 바로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지만, 생각 회로가 매우 단순한 나는 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대체 면접에서 무슨 말을 해서 그런 거지? 결국 나는 또 팀장님의 말씀을 해석하기 위해, 다른 팀원의 도움을 빌렸다.
'팀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뭘까요?'
'면접에서 보였다는 거겠죠.'
'뭐가요?'
'리넷의 덕력이요.'
그렇다. 정답은 덕력이었다. 이 회사는 콘텐츠 회사이다. 그 어떤 인재보다 콘텐츠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우선이 되고, 이들을 우리는 덕후라고 부른다. 또한 마케팅이라는 직무의 특성상, 트렌드와 인사이트를 파악하는 능력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덕후들은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트레이닝이 꾸준히 되어 왔다. 가령, 내 최애의 생일 카페를 하기 위하여 관련 레퍼런스를 찾아본다던가, 생일 광고를 걸기 위하여 요즘은 어떤 스타일의 광고가 유행인지 리서치 해본다던가 말이다. 사실 나는 내 덕질에 있어, 약간의 부끄러움
을 느끼는 편이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이 한심하게 바라봤었고, 대학생이 되자, 다 큰 성인이 아직도 저런 걸 좋아하냐라는 이유로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결국 나는 '일반인 코스프레'라는 선택을 했었고, 덕분에 내 주위의 아주 가까운 친구들이 아니고서는 나의 덕스러움은 비밀에 부쳐졌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덕질을 하며 살아왔다. 중학생 때부터 '빅뱅' 오프를 뛰며, 굿즈를 사모았었고, 고등학생 때부터는 생산러가 되어, '세븐틴' 팬 커뮤니티, 트위터 '세븐틴' 팬계, '짱구' 팬계 등을 운영하며 다양한 굿즈 제작 및 나눔을 진행하였으며, 성인이 되자마자 '스트레이 키즈' 찍덕이 되었고, 첫 차였던 '레이'의 차주 커뮤니티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최근에는 농구에 빠져, 모 선수의 팬카페 임원으로 활동 중이다. 중간중간 꾸준히 만화를 보고, 더쿠나 인스티즈 같은 팬 커뮤니티 활동을 하며, 아주 진하게 인터넷 세상에 매료되어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그들이 부끄러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남들의 질문이 피곤했을 뿐이다. 그러나 인턴 면접에서 처음으로 나는 '덕력'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좋아하는 만화 장르가 어떻게 되세요? 혹시 저희한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 있으신가요?'
'남성향 작품들은 어떤 커뮤니티에서 인사이트를 얻으면 좋을까요?'
'세븐틴 팬 계정을 운영하셨다고? 어떤 콘텐츠들을 올리셨죠?'
이는 면접을 빙자한, 나의 덕질 자랑 시간이었다. 다년간 자연스럽게 물들었던 것들이 인사이트가 되어, 면접에서 활용되었고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이 분야에 대해서는 내가 타 지원자들보다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나는 모두가 이 정도는 알고 있는 줄 알았다. 예를 들면, 트위터에는 투디 장르가, 인스티즈에는 아이돌 장르가, 더쿠에는 스포츠 장르가 많다는 것 말이다.)
이것은 먼 훗날 내가 다른 면접을 볼 때 이야기이지만,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콘텐츠를 단순히 향유하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이 정도로 분석적으로 살피고 인사이트가 풍부한 사람은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렇다. 단순히 보고 즐기는 정도로는 안된다. 좋아할 거면 확실히 좋아해라. 이것이 내가 찾은 첫 번째 비결이다. 가능하면 좋아하는 장르로 사업을 해본다던가. 팬카페 임원 정도는 되어서, 직접 행사를 주최한다던가. 그 정도의 덕력이면 아주 훌륭하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재능 위에 노력이 있다고. 그러나 노력 위에는 덕력이 있다. 노력하는 자는 덕질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절대. 왜냐하면 덕후들은 보상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내 고생에 대한 결과는 아무렴 좋다. 그저 그 과정 자체가 덕후들에게는 힐링이고 행복이니 말이다.
가끔 취업 커뮤니티를 보다 보면, '이런 활동이 취업에 도움이 되나요?', '취업에 도움이 되는 대외활동 추천해주세요'와 같은 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모두가 취업을 기준으로, 경험을 맞춰나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와 반대로 해나가길 조심스레 추천해본다.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회가 눈앞에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장르라도 말이다. 너무 속 편한 소리도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 한 명쯤은 이런 속 편한 소리도 해줘야, 사람이 꿈을 꾸지 않겠나 싶다.
아무튼 콘텐츠 업계에 발을 들이고, 내가 뼛속 깊이 깨달은 것은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나와 함께 일하였던 대부분의 팀원은 어떠한 한 장르 덕후였다. 무언가를 깊이 사랑해보고, 탐구해보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생산해내고, 이러한 경험은 덕후가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팬덤을 향해,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고 있는 이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당신은 누군가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사랑해본 적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