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하얀 물보라를 흩뿌리며 먼바다를 질주하는 제트 스키를 가리켰다. 제트 스키는 계획에 없었다. 전날에 탔던 카약을 한 번 더 타려고 해변에 나왔다. 문득 지난 유럽 여행 때 호두까기 인형을 못 사준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육아휴직의 마지막 추억으로 아들과 함께 제트 스키를 탔다.
"안 무서워?"
"무섭지. 아빠랑 같이 하면 괜찮아."
제트 스키는 처음 탔다. 나도 무서웠다. 아들도 무서운데, 내가 있으면 무섭지 않다고 했다. 예전에 대구 동성로에서 '대관람차'를 탈 때도 똑같은 얘기를 했다. 내가 아들을 달래주는지, 아들이 나를 달래주는지 모르겠다. 서로가 서로를 달래주는 것 같다.
필리핀 세부 호핑투어 '날루수안 섬'
육아휴직의 마지막 여행은 필리핀 세부였다. 복직 40여 일을 앞두고 아들과 3주간 세부의 한 기숙 영어학원을 다녔다. 세부 도심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시골 마을이어서 조용하고 한적했다.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는 곳이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옆 동네 마트에 가거나 인근 유원지에 가는 게 다였다. 여유로움을 찾아 세부 시골로 왔고, 이렇게 지내는 게 너무 좋았다. 어학연수를 했다기보다 잠시 다른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인생은 되돌아보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가 있다. 딱 5년 만에 세부를 다시 찾았다. 세부는 2018년 3월 초 '이직 여행'으로 아내, 아들과 함께 처음 왔다. 지금 회사로 이직이 확정되고 나서 출근할 때까지 시간이 남았다.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기 위해 세부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세부 시티에 있는 '래디슨블루호텔'과 막탄에 있는 '크림슨리조트'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세부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그런지 대단히 만족했던 여행이었다.
아들은 아얄라 몰에 있는 간이 트램펄린을 타며 신나게 뛰어놀았고, 아내와 나는 타이 음식점 '시암'에서 식도락을 즐겼다. 레디슨블루호텔 바로 옆에 있는 SM 몰에서 아들의 아디다스 샌들도 샀다. 크림슨리조트의 웅장한 키즈카페를 보고 놀랐고,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의 친절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깔끔하게 관리돼 있는 필리핀 전통 양식의 방(룸), 이와 대조적인 모던하면서도 잘 정비된 부대시설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크림슨리조트 조식당에서 마련해 준 나의 '깜짝 생일 파티'에 우리 모두는 감동했다. (체크인할 때 내 여권을 보고 준비했으리라 짐작된다.)
필리핀 세부 탐불리 리조트(Tambuli Resort) 프론트
복직을 앞두고 비슷한 시기에 세부에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찾은세부는 지난해(2022년) 태풍으로 곳곳이 피해를 입었다. 크림슨리조트는 전면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 예약 자체가 불가했다. 비용이 부담되더라도 서울에 있는 아내까지 셋이 크림슨리조트에 한 번 더 가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크림슨리조트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탐불리 씨사이드 리조트 앤 스파를 예약했다.
"세부 3성급 리조트 정도면 어딜 가더라도 아이들은 다 좋아합니다. 결국 부모가 좋아하는 곳으로 예약하더라고요."
크림슨리조트가 비싼 만큼 값어치를 한다면, 탐불리리조트는 '가성비' 호텔이었다. 나에게는 2% 부족해 보였지만 아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했다. 아들에게는 방도, 조식당도, 수영장도 부족할 게 없었다. 나는 탐불리리조트에서 아들과 함께 '마지막 댄스'를 즐겼다.
"한국인은 모두 내 친구"
탐불리 리조트 프라이빗 해변에 있는 직원 로날드(Ronald)는 우리를 처음 보자마자 친구처럼 대해줬다. 로날드는 해양 액티비티 전담 직원이었다. "한국인을 좋아하고 한국인은 전부다 나의 친구"라고 얘기하며 유쾌한 호객(?) 행위를 했다. 그러면서 무료로 카약을 30분을 탈 수 있게 해 주겠다면서 안내했다. 원래 무료인지 유료인지 알 수 없지만 로날드의 입담과 태도는 나뿐 아니라 탐불리 리조트 다른 직원들도 웃게 만들었다.
필리핀 세부 탐불리 리조트 카약
카약은 코로나19 직전 다녀온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샹그릴라 리조트에서 처음 탔다. 무서웠지만, 아들이 옆에 있어 용기가 났다. 그날을 추억하며 세부의 땡볕 아래에서 아들과 카약을 탔다. 좁은 배에 몸을 싣고 노를 젓는 게 지루하지 않았다. 아들이 좋아하는 '이순신 놀이'도 했다. 다음날 수영장이 조금 지루해질 때쯤 아들과 함께 다시 로날드를 찾았다. 카약을 한 번 더 타려고 했는데 아들은 바다를 날아다니는 제트 스키를 원했다.
로날드는 변함없이 친절히 우리를 맞았고 액티비티를 안내했다. 제트 스키는 30분에 3600페소, 우리 돈으로 10만 원에 육박했다. 동남아 물가치곤 꽤 비쌌다. 로날드는 아들과 함께 타도 된다고 했다. 제트 스키는 외부 업체에서 대행했고 제트 스키가 도착할 때까지 아들과 둘이서 카약을 탔다. 다시 전쟁놀이, 이순신 놀이를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카약을 탔다. 쨍한 날씨에 바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순간순간이 소중했다.
필리핀 세부 탐불리 리조트 제트 스키 1. 연습
제트 스키가 도착했고 5분 동안 조정법을 익힌 뒤 아들과 함께 바다로 나갔다. 막상 핸들을 잡으니 긴장감이 엄습했다. 눈앞에 짙은 푸른색 바다를 보니 더 무서웠다. 선착장과 멀리 떨어져 달려야 했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선착장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됐다. 로날드와 직원들이 저 멀리 나가라고 손짓했다.
"아빠 허리 꽉 잡아야 해."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니 용기가 생겼고 제대로 타고 싶었다. 차츰 속도를 올렸고 거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바다 위를 날아다니듯이 퐁퐁 점프하면서 달렸다. 아들과 나는 둘만의 세상에 빠졌다. 소리를 지르며 바다를 누볐다. 여유가 생겨 지나가는 배에 손도 흔들었다. 파란 하늘 아래, 망망대해에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파도를 거슬러 달릴 때는 제트 스키가 물 위에서 튕겨 나가는 스릴이 있었다. 방향을 틀어 파도와 같은 방향으로 달릴 때는 제트 스키의 속도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소리 지리고 또 질렸다. 돈이 아깝지 않았다.
필리핀 세부 탐불리 리조트 제트 스키 2. 출발
무사히 도착한 선착장에서 우리는 엉망진창이 된 몰골을 보고 서로 웃었다. 아들은 나의 허리를 너무 꽉 잡고 있어서 팔이 아프다고 했다. 그래도 다음에 아빠랑 또 타겠다고 했다. 나도 제트 스키의 매력을 알게 됐다. 다음에 탈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더 도전하고 싶다.
나와 아들은 세부 영어학원에서 3주간 머물러도 거의 그을리지 않고 한국에서 갖고 온 그 피부 상태를 유지했지만, 리조트와 바다에서 놀았던 사흘간 새까맣게 타버렸다. 해양 액티비티를 할 때는 선크림을 꼭 바르고 가릴 수 있는 곳은 다 가리는 게 피부 건강에 좋을 것 같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몸은 나의 마지막 댄스의 전리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