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의 자리, 노새의 자리
나는 어려서 위인전을 좀 읽은 편이었다. 친구들이 지루해 하는 위인전이 나는 나름 재미가 있어서 국내, 해외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위인전을 읽었다. 어렸을 때라 그런지, 그 때 읽은 책에 나온 위인들과 관련된 삽화가 머리에 각인되어, 그 위인의 이름을 들으면 그 이름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나폴레온의 경우에는 당연히 백마를 탄 나폴레온이다.
이 작품은 자크 루이 다비드라는 화가가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추운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는 나폴레온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나폴레온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니 나폴레온도 멋있게 그려지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백마가 참 인상적이었던 그림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폴레온을 태우고 알프스를 넘은 건, 백마가 아니라 노새였다는 것도 나름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폴 들라르슈라는 화가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온' 이라는 아래 그림이 더 사실에 부합하는 그림이다.
하지만, 나폴레온은 노새가 아니라 백마와 함께 그려진 그림을 매우 좋아했다고 전해잔다. 그런데, 엉뚱한 생각이 든다.
나폴레온을 등에 태우고 알프스를 넘은 노새는 어떤 그림을 더 좋아했을까?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노새는 자신이 멋지게 백마로 포장된 그림을 더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자신의 모습을 알더라도 힘들어 고개 숙인 노새로 그려진 그림 보다는 멋있는 백마로 그려진 그림을 더 좋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우리는 매일 이런 경험을 한다. 회사를 다닐 때의 내 모습도 그랬다. 백마의 모습을 부러워 하고 백마의 자리를 부러워 했다. 그래서 백마라는 말이 너무 듣기 좋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나는 노새였지만, 남들이 백마라고 치켜세우면 마치 백마가 된 듯한 착각을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나의 내일에 필요한 것보다 부서장이 내일 필요로 할 것을 챙기고, 나의 내년에 필요한 것보다 회사의 내년에 필요한 것을 먼저 챙기다 보니, 회사에서는 나는 백마라 했다.
그 때마다 뿌듯했다. 그 때마다 흡족했다. 회사 생활이 즐거웠고, 매일 매일이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새는 열등하고 백마는 뛰어나다는 선입견을 마음 깊이 가지고 있어서 그랬다.
하지만, 지나고 생각하니, 나는 노새였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낯선 땅 캐나다에 와서 알프스를 넘은 노새처럼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 남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백마였다면 얼어 죽었을 일이니 캐나다 땅에서 얼어죽지 않은 것만 보아도 나는 백마는 아니었건만, 백마라 불러주는 그 때가 왜 그렇게 뿌듯하고 흡족했을까. 왜 나는 그 때의 매일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아름답다"라는 말의 어원은 "안다"는 뜻과 "나답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 백마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백마는 백마답고, 노새는 노새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었다. 백마와 노새의 우열은 사실 우리의 선입견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는 내가 노새라는 것을 몰랐고, 노새로 사는 것이 백마로 사는 것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노새라는 것을 알고, 노새답게 사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를 모르고 그래서 나 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그 때는, 결국 아무리 애를 써도 아름다울 수 없었다는 것을 조금 늦게 알았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를 백마로 치장하지 않아야 하고, 나를 백마인양 치켜세우는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백마는 아름답고 노새는 아름답지 않다는 말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노새가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간단하다. 백마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노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면 된다.
그래도 혹시 백마로 멋지게 그려진 그림을 남기고 싶은가.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노새로 아름답게 살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백마로 그려 남긴다.
마치 나폴레온의 노새가 백마로 남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