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말하느냐 vs 무엇을 말하느냐
얼마 전 한국의 한 후배와 아이의 영어 교육 문제로 상담을 했다. 아직 어린 아이지만, 반에서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자기도 영어를 잘 하고 싶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영어 교육에 대한 열풍이 아이들에게까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도 한국의 후배들이 자녀의 영어 교육을 위해 조기 유학을 고민하는 것을 본다. 요즘에는 한류의 영향으로 그렇지는 않지만, 얼마 전까지는 캐나다에 이민을 온 가정마저도 아이들의 영어를 걱정하여 집에서도 영어만 쓰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이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정말 '영어'여야 할까, 하는 의구심이 있다.
유창한 발음과 막힘없는 회화 실력은 분명 큰 장점이다. 하지만 그것이 언어 교육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UN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 총장은 원어민과 같은 발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다. 세계의 지도자들은 그의 유창한 영어 발음이 아니라, 그의 말에 담긴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사고는 언어로 이루어지고 언어를 구사하는 수준이 곧 사고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영어, 불어, 일어, 독어, 중국어... 이렇게 여러 언어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구사하는 것보다, 하나의 언어라도 깊이 있게 구사하며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펼칠 수 있는 능력이 훨씬 중요하다.
캐나다에서 로펌을 다니면서 깨달은 것은, 소위 배운 사람들일수록 사람들이 상대방의 발음이나 문법적 실수에는 비교적 관대하지만, 대화의 내용이 빈약한 것은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소통의 핵심은 '어떻게' 말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는지에 있었다. 그 '무엇'을 제대로 생각해 낼 능력이 없다면 국제 무대에서 리더의 자리에는 올라설 수 없다.
그렇다면 생각의 깊이는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 바로 우리의 모국어, 국어 구사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국어의 수준이 높아져야 영어로 도달할 수 있는 지점도 높아진다. 탄탄한 국어 실력으로 다져진 사고력과 어휘력은 외국어를 배울 때 강력한 날개가 되어주며, 어떤 개념을 국어로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어학연수 한번 다녀오지 않은 '순수 국내파'이지만 EBS 영어 강사로 명성을 떨친 이보영 선생님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만약 영어를 '언어'로서만 배울 생각이라면, 굳이 먼 길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만났던 한국 유학생 한 명은,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늦은 나이에 캐나다를 왔지만,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귀에서 영어 테이프를 빼지 않는 독한 노력 끝에 유학 1년만에 "교포 2세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영어 자체는 의지와 노력으로 충분히 정복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의 힘은 그런 방식으로 길러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국어 학습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나의 세계를 넓히는 매우 유익한 경험이다. 특히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영어는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창문 역할을 한다.
캐나다에 처음 왔을 때, 사람들이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기를 꺼리는 것을 보고 내심 기분이 상했던 적이 있다. 주차된 차에 연락처를 남기는 것이 당연했던 한국 문화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사회적 기준의 차이일 뿐, 나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다른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과정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영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선물이 아닐까?
흥미롭게도 '세상에서 외국어를 가장 못하는 나라'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들이라고 한다. 다른 언어를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은 하나의 언어라는 틀에 갇혀 다른 방식의 사고를 경험할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인 이민 가정의 아이들이 가진 특별한 강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의 1.5세들에게 어떤 언어로 생각하는지가 더 편한지 물으면, 대부분 '국어와 영어를 섞어 쓸 때 더 깊은 사고가 가능하다'라고 답한다. 영어나 국어만으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두 언어의 조합으로 비로소 완성해내는 것이다. 이건 캐나다에서 영어만 배우고 자란 아이들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국어라는 튼튼한 뿌리를 가진 아이들은, 영어라는 날개를 달고 캐나다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갖지 못한 또 하나의 세상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 영어만을 위한 조기 유학을 고민 중이라면 아이의 영어 교육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유창하게 영어를 말하는 것이 목표라면, 1년간 아이에게 영어 테이프만 들려주는 것으로도 어쩌면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가 자신만의 생각과 철학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면, 영어로 남들을 가동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면 답은 명확하다.
아이의 손에 영어 단어장 대신, 국어로 된 책 한 권을 먼저 쥐여주는 것. 그것이 내 아이를 글로벌 인재로 키우는 가장 확실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