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땅이 어디인가?
지난 여름, 토론토는 유난히 아침 비가 많았다. 매일 이른 아침에 운동을 하는 나에게 루틴을 깨는 아침 비는 반가운 준재는 아니다.
토론토는 집집마다 앞마당, 뒷마당이 있어서 어느 길에나 흙과 잔디가 넘쳐난다. 자연히 지렁이도 넘쳐난다. 그래서 비가 충분히 내리면 아스팔트 도로는 오래간만에 바깥 바람 쐬러 나온 지렁이들로 가득하다. 아스팔트면 어떻고 잔디면 어떤가. 물이 넘쳐나니 지렁이들은 신이 난다.
하지만, 비가 그치고 나면 상황이 180도로 달라진다. 태양이 잠깐 반짝만 해도 아스팔트는 급격하게 말라가고, 몇 시간이 지나면 아스팔트는 객사한 지렁이로 넘쳐난다.
어떤 지렁이는 용케 아스팔트가 마르기 전에 흙으로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 물에 취하면 스스로가 흙을 벗어났다는 것을 알아 차리기 어렵다. 비가 계속 내릴 것 같고, 물이 계속 내 주위에 차고 넘칠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결국 물은 마른다. 물이 마르면 내 힘으로 땅을 파야 한다.
그래서 물이 말랐을 때, 내가 밟고 서 있는 곳이 내 힘으로 파 낼 수 있는 곳인지, 나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물길을 틀 수 있는 곳인지를 항상 살펴야 한다.
물이 넘치는 곳이 아니라, 물이 없을 때에 스스로의 힘으로 물길을 틀 수 있는 곳에 머물러야 한다. 여기 저기 물이 넘쳐나더라도 말이다.
물이 넘쳐난다고 아스팔트로 가면 말라 죽는다. 스스로 물길을 낼 수 있는 흙에 머물러 있는 한, 지렁이는 비가 그쳐도 자신의 기반을 잃지 않고, 목숨을 위협받지도 않는다.
지렁이 뿐인가. 팬데믹 때에 사람들도 그랬다. 정부가 돈을 풀어 사방이 돈 천지일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본업을 제쳐두고 주식에, 코인에, 그 밖의 여러가지 돈 잔치에 몰려 들었다.
한국도 그랬지만 캐나다도 마찬가지여서, 팬데믹이 끝나고 정부가 돈을 거두어 들이니, 시장에서 돈은 순식간에 말라갔다. 여기저기에서 돈을 거두어들이니, 마치 물 마른 아스팔트위 지렁이처럼 많은 분들이 돈 줄이 말라 고생하셨고 , 자신들의 힘으로 다시 땅을 팔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가신 분들 중에서는 파산한 분들도 적지 않다.
안세영 선수가 며칠 전에 있었던 2024년 파리 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달고 국제 대회 참석차 출국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며, 예외적"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경기화를 신고 출전한다고 한다. 배드민턴 동호인의 한 명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다른 선수들과 시차를 두고 출국 절차를 밟았다는 기사가 마음에 걸린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라도 올림픽 이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던 안세영 선수의 발언에 대한 후유증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사실 안세영 선수의 발언이 논란이 된 후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 이제는 관심도 좀 식은 듯도 하고, 안세영 선수가 제시한 문제 자체보다는 정치적인 부분이 더 부각되는 듯 보이는 때도 있다. 물론 아직은 대중이, 언론이, 정치가 안세영 선수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진행이 되면 안세영 선수의 발언은 그저 찻잔 속 태풍으로 지나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안세영 선수가 자신의 발언을 찻잔 밖으로 내 보내는 방법은, 자신보다 큰 거물들을 상대로 제대로 꿈틀하는 방법은, 사실 하나 밖에 없다.
그건, 잔디밭을 지킨 지렁이처럼 자신이 밟고 설 땅이 어딘지 보고, 그 자리에 머무르는 거다.
안세영 선수에게 대중의 관심은, 팬데믹 동안 사람들에게 저절도 내린 돈과 같고, 지렁이에게 하늘에서 퍼 부은 비와 같다. 안세영 선수의 발언에 동료 선수들이, 선배 선수들이, 대중이, 언론이, 정치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금, 안세영 선수는 그 넘치는 관심을 따라 아스팔트로 나오면 안 된다.
조금 잔인하게 들릴 지는 모르지만, 안세영 선수에게 잔디밭은 결국 배드민턴이고 성적이다.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관심은 곧 마르겠지만, 성적이 뒷받침되면 안세영 선수의 발언은 계속 힘을 얻어갈 것이다. 지렁이가 물에 취하듯 관심에 취해서 자칫 잔디밭 바깥으로 나가는 우만 범하지 않으면 된다.
안세영 선수도 아마 그걸 알고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내세울 수 있는 성적을 거둘 때까지 기다린 것 아니겠나. 그 마음과 그 성적을 오랫동안 유지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