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바라는 것이 생겼다.
이전 사무실에서는 커피를 내려서 마셨다. 사무실에 가장 먼저 온 사람이 5-10인분의 커피를 내리고, 그 뒤에 오는 사람들은 땡큐라며 그 커피를 마시는 식이었다. 종종 고객들이 갈지 않은 커피콩을 맛있다고 사다 주시면 커피를 갈아서 커피를 내렸는데, 그럼 사무실 전체에 은은하게 커피향이 퍼졌고, 고객들도 그 향을 좋아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려놓은 커피가 식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커피 맛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아서 커피가 식으면 그냥 전자렌지에 데워서 마셨지만, 직원들은 커피가 식으면 커피를 버리고 다시 내렸다. 낭비이기도 했지만 커피를 내리는 건 누구에게나 귀찮은 일이었다. 미팅이 많았는데 고객들이 커피를 찾으시면 그 때마다 또 커피를 버리고 다시 내리는 것도 번거로운 일었다.
직원들도 불편하니 1회용 캡슐을 쓰는 기계를 사자고 여러 번 제안했고, 그래서 2년 전 사무실을 옮기면서 네스프레소 기계를 샀다.
열심히 리뷰를 보고, 또 보았는데, 네스프레소 original 모델이 막 갈아서 내린 에스프레소의 향을 가장 비슷하게 잘 낸다기에 그것으로 샀다.
물론 직접 커피 전문점에서 뽑아주는 에스프레소만은 못하겠지만, 큰 차이는 없다고 하니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한 2년, 다들 아무 불만없이 네스프레소 기계를 써 왔다. 편했다. 비용은 더 비싸지기는 했지만, 여러가지 맛을 갖추어 놓기만 하면 각자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맛으로 따뜻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고, 고객들도 좋아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편한 걸 진작 살 껄,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래서 집에도 같은 기계를 사 놓고 온 가족이 사용했다.
그런데 얼마 전 딸이 이디오피아를 다녀 왔다. 여러가지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했지만 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커피를 끓이는 것이 가장 신기했단다. 우리로 따지면 조선시대 주병과 비숫하게 생긴 주전자 형 토기에 커피와 물을 넣고 끓여 마시는 데, 너무 맛있었다고. 그렇게 알게 된 것인데 이디오피아가 커피로도 유명하단다. 그래서 이디오피아 커피와 토기 한 세트를 사 가지고 왔다. 아빠, 엄마에게 끓여주겠단다.
그래서 딸이 해주는 대로 마셔 보았는데, 커피 맛을 모르는 내 입에도 맛있게 느껴졌다. 그 때만해도 나는 이디오피아에서 갓 볶은 콩을 가지고 와서, 집에서 직접 갈아서 마셔서 맛이 더 좋은가 보다, 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그 동안 고객들이 사다 주신 커피들이 사무실에 봉지 째로 쌓여 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캡슐만 마시다보니,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 이 커피들도 다 마셔야 하니, 나는 예전처럼 내려서 마셔야겠다. 내 방에서 나만 내려마시면 되지"
커피 한 봉지를 골라, 소량을 기계로 갈고, 커피 내리는 기계에 내렸다. 사무실에 예전처럼 커피 향이 퍼졌다. 그리고, 거의 2년 만에 사무실에서 내린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맛있었다. 이디오피아에서 갓 볶은 커피 콩이 아니어도 맛있었다. 그리고 네스프레소보다 향기로웠다.
왜 몰랐을까. 직접 갈아서 내리는 커피가 캡슐에 넣어 유통한 커피보다 좋은 맛과 향을 가지는 것이 어쩌면 너무 당연한데도, 커피를 갈아 내리는 불편함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캡슐이 주는 편안함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귀찮음에서 한 발 멀어지려는 생각을 한 것 뿐인데, 커피의 맛과 향을 잃었다. 그러고도 그걸 몰랐다.
커피 뿐일까. 시간에 쫓기는 매일매일을 견디면서 나는 아마도 많은 곳에서 시간을 줄이고 귀찮음을 줄이기 위해 최선대신 차선을 선택하고, 다시 거기서 차선을 선택하고, 또 거기서 차선을 선택해 왔을게다.
그러다보니, 이젠 처음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왔는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처음은 뭐였는지도 모르는,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 처음을 다시 맛 보고 나서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왔는지를 알게 될텐데.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내가 멀어져 온 것들을 생각해 내는 데에 시간을 써 보는 중이다. 내가 조금씩 포기한 가치가 무엇인지는 알아내야 할 테니까. 커피 맛을 찾았듯 다시 찾아 내야 할 테니까.
며칠 전 딸이 이렇게 말했다.
"아빠, 미안한데, 나 이제 네스프레소는 못 마시겠어"
그래, 네가 커피 맛을 알았구나. 네스프레소에겐 미안하지만, 아빠도 이젠 못 마시겠다. 이 커피 맛을 꼭 기억하렴. 이 바쁜 세상에서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평생 시간에 쫒기고 귀찮음에 쫓겨서, 최선에서 차선으로, 차선으로, 다시 차선으로 그렇게 조금씩 가치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잃어버린 가치가 무엇인지마저 잊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잊어버렸다면 커피 맛을 기억해 내듯이 다시 잊은 것을 기억해 내기를, 아빠는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