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불쌍해지는 때는 말이야...
몇 주 전 어느 저녁에 아내가 말해 주었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딸이 집에 다녀 갔는데, 엄마한테 그랬다는 거다.
"아빠 불쌍해"
갑자기 이게 뭔 소리인가 했더니, 내용인즉슨 이랬다.
로스쿨을 시작한 딸이 보니, 동기 중에 나이 든 사람이 여러 명 있더란다. 그 중에 중국인도 몇 명 있는데, 중국에서 얼마 전에 바로 온 듯 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 왜 그렇게 생각했냐고 하니, 영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단다.
그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은 30대로 보였는데, 가끔 그 사람 뒷 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듣다보면 수업 중에 항상 번역기와 ChatGPT를 돌리고 있다고 했다. 도대체 저렇게 해서 어떻게 수업을 듣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수업 뿐이 아니라, 교재를 읽기도 느리고, 발표도 어려워하니,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불쌍해"
그 중국인도 나름 외국 로스쿨까지 진출한 상황이었으니,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딸이나 다른 로스쿨 학생들은 그 중국인을 불쌍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측은지심은 인간의 고유 본성 중 하나라고 하지 않는가.
근데, 딸은 그러다가 갑자기 나이 40에 로스쿨에 입학한 아빠 생각이 났다고 했다. 아빠도 저랬겠구나, 30대로 저런데 40이었던 아빠도 힘들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갑자기 아빠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역지사지라더니, 로스쿨 가서야 아빠가 고생한 걸 아는구나... 라고 웃으면서 말했지만, 사실 내가 생각해도 불쌍했던 장면이 내 로스쿨에 있었다.
1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드디어 학점이 나왔던 때였다. 모든 학점이 실망스러웠지만, 특히 실망스러웠던 건 형법이었다. 고 2 이후로 나이 40이 될 때까지 평생 이과생으로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 성향에 맞는 법 과목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계약법과 형법에서는 약간이나마 이과적 감성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더랬다. 그래서 나름 기대도 했는데, 형법 학점이 가장 나빴던 거다.
모든 학생에게 보장된 피드백을 받기 위해 교수와 면담 약속을 잡고 찾아갔다. 학점이 그토록 나쁜 이유가 무엇인지, 답안의 어디가 그렇게 잘 못 되었고, 내가 형법의 어디를 그렇게 잘 못 이해했는지 알아내리라, 그리고 다음 기회에 만회하리라, 생각했다.
내 학점이 왜 이렇게 나쁜지 여쭤보았더니, 내 시험지를 꺼내드신 교수님께서 더듬더듬 영어로 말하는 나와 시험지를 번갈아 보시다가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학점이 그렇게 나쁘니 뭐, 미안하실수도 있지... 라고 생각했지만, 학점 나쁜 것은 내 말못이지 교수님 잘못은 아니니, 미안하다고 할 일은 아니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교수님의 다음 말이 충격적이었다.
"미안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서 평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답안이 뭔가 잘 못되고, 내가 형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영어가 문제여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지 전혀 전달이 되지 않아서, 그래서 교수님은 제대로 채점을 하실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공부해서 다음 학기에 만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엉망일리가.. 라고 생각하고 내 답안을 출력해 달라고 해서 읽어보니, 이럴수가 - 내가 쓴 답안이지만, 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를 보는 교수님의 눈에는 미안함과 불쌍함이 가득했다. 나도 내가 불쌍했다.
사실 나도 한국에서는 그렇게 영어가 딸리는 편이 아니었다. 다국적 기업 내에서도 영어를 좀 하는 편에 속했다. 그런데, 시간이 촉박한 기말 고사 상황에서 머리에 있는 것을 타이핑으로 마구 뱉어 내다 보니, 다시 찬찬히 읽어볼 기회도 없이 타이핑을 치고 치고 또 치기만 하다가 시험을 마쳤더니,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영어 문장들이 답안지에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정말 불쌍한 건 학점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내가 불쌍하다는 걸 가까운 사람과 나눌 수 없을 때라는 걸 그 사건으로 알았다.
남편이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 내 아내는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나는 타향살이에서 가장 힘이 되는 아내에게도 그 일을 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 사건을 마음에 묻었었다.
잠을 줄여 영어에 더 많은 투자를 했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영어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라 저절로 해결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는 그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고, 2학년부터는 학점도 꽤 우수하게 받을 수 있었다.
17년간 마음에만 묻어 두었던 이 일을 지난 주에 딸에게 말해 줬더니, 안아준다.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