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이 얼굴이 될 때까지
미국이나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캐나다 로스쿨에 입학하면 선배나 동기들을 통해 소위 '카더라' 통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내용은 대부분 어떻게 좋은 학점을 받고, 어떻게 원하는 로펌에 들어가는가에 대한 것들이다. 낯선 환경과 만만치 않은 수업만으로도 벅찬데, 졸업 후의 삶을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들의 목록은 끝도 없이 길어 보인다.
"판례 다 못 읽었어도 교수님 앞에선 절대 티 내지 마."
"자원봉사 이력은 미리미리, 충분히 만들어 놔야 해."
"로펌들은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스터디 그룹부터 만들어."
"관심 있는 로펌 변호사들에게 콜드 메일 보내서 커피 챗 요청해."
"추천서 써 줄 교수님 한두 분은 꼭 만들어 놓고."
듣다 보면 숨이 턱 막힌다. 그걸 다 할 시간은 어디 있으며, 나는 천성이 내향적인데, 교수님과 사적으로 친해지는 건 영 내 스타일이 아닌데 등등.
이런 고민에 빠진 신입생들에게 선배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건네는 말이 있다.
Fake it till you make it.
그런 척해라. 설령 지금은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하지 못할지라도, 이미 그런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흘려들었다. 로스쿨에 늦게 진학한 내 입장에서 나보다 15년 이상 어린 선배들의 치기 어린 조언쯤으로 여겼다. 나답지 않은 모습을 꾸며내는 것보다는, 투박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리는 것이 맞다고 믿었다. 나는 한국에서 그렇게 내 자리를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 신념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척'을 하지 않으면, 애초에 '진짜'를 보여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눈 앞에서 보고 들으면서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내향적이 사람이지만, 1학년 때 로펌 면접을 보며 외향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목소리 톤을 높이고, 제스처를 크게 하고, 스몰 토크를 이끌었다. 면접이 끝나고 나는 나보다 12년 어린 3학년 한국인 멘토에게 하소연했다.
"도저히 외향인으로는 못 살겠는데. 어떻게 하지?"
멘토의 대답은 간결했다.
"누가 진짜 외향인이 되래요? 외향인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으면 되는 거죠."
"언제까지?"
"사람들이 외향적이라고 느낄 때까지. 일단 그 단계에 도달하면, 그 뒤엔 다시 내향인으로 돌아가도 상관없어요."
그 대화 중에,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할 때 들었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한국 사람은 상대방이 믿지 못할 짓을 할 때까지 믿어주지만, 서양 문화에서는 믿을 만한 행동을 보여줄 때까지 믿지 않는다는 말.
이곳은 증명의 세계였다. 그래서일까, 로스쿨에는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의 최강록 셰프 같은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조림을 잘 하는 척 해야 하는 사람들.
자신감 있는 척하기 위해 밤새 판례를 읽고, 그리고도외향적인 척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웃는 연습을 한다. 원하는 모습이 되지 않으면 문조차 열어주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해서 일단 그 사회에 들어가 인정을 받으면 비로소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갈 자격이 주어진다.
Fake it till you make it은 남을 속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척이라도 해야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었다. 그 관문은 그들의 언어를 사용해야만 통과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이 말에 거부감을 느꼈던 건, 아마도 내게 너무 낯선 방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준비가 완벽하게 끝난 뒤에야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었다. 묵묵히 실력을 쌓으면 언젠가 누군가 알아봐 주겠지, 하는 믿음. 하지만,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기대치를 가진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지 않는 실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내면이 꽉 찬 사람이라도, 그들의 언어를 모르면 텅 빈 사람으로 읽혔다.
그래서 나도 여러 분야에서 '척'을 시작했다.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능숙한 척, 판례가 이해되지 않아도 여유로운 척, 가슴이 콩닥거려도 당당한 척. 처음에는 그 가면들이 너무 무겁고 어색했다. 하지만 그 척을 뒷받침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했고, 어느 순간 그 척이 조금씩 실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면인 줄 알았던 것이 어느새 내 얼굴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로스쿨에서 배운 것 중 가장 기이한 역설은 이것이다. 나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였던 이 과정이, 결국은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길이었다는 것. 원하는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그 세계의 언어를 배우는 것, 그것은 굴복이 아니라 번역이었다.
물론 모든 척이 해피엔딩을 보장하진 않는다. 기껏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내가 원하던 방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문밖에서 서성이며 지레짐작하는 것보다는, 일단 들어가 확인해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래서 가끔 나는 이런 조언을 준다.
원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모습이 있다면, 일단 그 가면을 써라. 그리고 그 가면이 얼굴이 될 때까지 연습하라.
문은 그렇게 여는 것이다. 적어도 로스쿨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