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결혼식 축사
오늘 제 아들 ㅈㅅ이와 며느리 ㄷㅎ의 앞날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 귀한 걸음 해 주신 내외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보석같이 귀한 외동딸 ㄷㅎ를 30년 동안 이렇게 아름답고 지혜롭게 키워주신 사돈 내외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활짝 웃고 있는 이유는, 한 일이라고는 ㅈ이에게 여자 잘 고르는 DNA를 물려준 것 밖에 없는데, ㄷㅎ를 며느리로 맞는 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조금은 불공정거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돈 내외분께 죄송한 마음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수 이효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좋은 남자, 좋은 여자 찾을 필요 없다, 내가 좋은 남자, 좋은 여자가 되면 자연히 좋은 여자, 좋은 남자가 내 옆에 온다구요. 그러고 보면 ㅈㅅ이는 아빠인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남자인가 봅니다.
그리고 같은 30년 세월 동안, 저 무뚝뚝한 아들 키우느라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써준 제 아내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오늘 제 아내가 낀 하얀 장갑은 30년 전 저희 결혼식 때 아내가 꼈던 것입니다. 30년도 더 된 마음을 정성스럽게 지켜온 것에도 감사를 표합니다.
저는 평소엔 준비성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 가끔 이상한 곳에서 철저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오늘 사용할 축사를 ㅈㅅ이가 아직 유치원생일 때 미리 써 두었지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기질 않는 겁니다. 가끔 쪽지가 잘 있는지만 확인하며 '이걸 쓸 날이 오긴 올까' 싶었는데, 어느 날 선물처럼 ㄷㅎ를 데려왔습니다. 게다가 제가 옆구리를 찌르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결혼식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ㄷㅎ가 제게 축사를 부탁하더군요. '드디어 내 25년 준비가 빛을 발하는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늘 반전이 있죠. 작년까지 잘 있던 그 쪽지가 사라졌습니다. 그 동안 쪽지가 있는 지만 확인했지 펴 본 지가 오래된 내용이라 기억도 나지 않아 결국 새로 원고를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니 새 출발을 하는 두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결혼한 몇몇 신부에게 물어보니 뜻깊은 축사보다는 짧은 축사가 좋았다 했습니다. 이미 짧기는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짧게 하기 위해 제가 고민 끝에 고르고 고른 오늘의 주제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것입니다.
"자해공갈이 통하는 부부가 되어라."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표현이 무색해진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게다가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예전보다 서로 더 오래 보고 살아야 하다 보니 다툼의 기회도 늘어나, 부부간의 다툼을 잘 관리하는 기술이 절실하게 필요해 졌습니다. 다툰 뒤에 각 방을 쓰지 말라거나, 다툴 때에는 존대를 하라는 등 여러가지 기술이 있지만, 그 중에서 조금 강한 자해공갈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 부모님 세대에는 정말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부부간의 다툼 끝에 나오는 '필살기'가 있었습니다. "나 밥 안 먹어!", "차 세워, 걸어갈 거야!", "약 안 먹어! 아프게 내버려 둬!" 같은 거요. 저는 이것을 자해공갈의 기술이라고 부릅니다.
요즘에야 다투고 나면 "먹든가 말든가", “아프든가 말든가” 하겠지만, 그때 어르신들은 '내가 옳다'는 자존심보다 배우자의 몸이 상하지 않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아침을 굶고 출근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고, 남편은 아내가 추운 날씨에 걸어가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자해공갈이라는 비장의 한 수를 시전하면 기꺼이 먼저 져 주셨습니다. 그것이 가정을 지키는 지혜였습니다.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죠. 부모나 형제자매는 피붙이이고, 배우자는 굳이 말을 갖다 붙이면 물붙이가 됩니다. 하지만 제가 연세드신 고객들을 만나다 보면, 내 정신이 흐릿해 지고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 끝까지 곁을 지켜주는 사람은 대개 물붙이인 배우자입니다. 피보다 진한 물이지요.
하지만 물은 저절로 진해지지 않습니다. 맹물 한 잔에 사랑과 희락, 화평과 인내,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 그리고 절제를 계속 넣어가며, 두 사람이 오랜 시간 함께 우려낼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게 피보다 진한 물 한 잔을 완성하는 그 힘든 작업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마법의 가루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상대의 자해공갈에 기꺼이 굴복해 주는 마음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 기술은 먼저 쓰는 사람이 무조건 유리합니다만, 아내가 9번 사용할 때 남편은 1번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약이 있는 기술이라는 것을 ㅈㅅ이가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ㄷㅎ와 ㅈㅅ이가 함께 맹물 한 잔을 받아듭니다. 사라진 제 축사 쪽지처럼 마지막 하나가 모자라서 안타까운 일도 있겠고, 제 아내의 장갑처럼 끝까지 지켜 이루어 내는 계획도 있겠지만, 일희일비 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하지만 멈추지도 않고, 함께 이 한 잔의 물을 피보다 진하게 우려낼 사명이 오늘 주어졌다는 것을, 집에서든, 식당에서든, 교회에서든, 물을 마실 때마다 기억해 내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민수기 말씀을 빌어 두 사람을 축복하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축복하시고 지키시기를 원하며,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두 사람, 정말 축하한다. 잘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