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무엇이 당신을 기쁘게 합니까?
내 아내가 내 사진을 내 허락도 없이 어느 그룹 카톡에 올렸다. 내가 너무너무 행복에 겨운 얼굴을 하고서 어느 테이블 위에 놓인 박스 하나를 끌어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다들 궁금해 할 밖에.
도대체 박스 안에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행복해 하나요?
금덩이라도 들었나요?
카톡 방에 있는 모두가 궁금해 하니 밝히고 싶지는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전후사정을 밝혀야 했다.
때는 바야흐로 2023년. 내가 위스키 공부를 시작한 지 어언 3년차가 되는 해였다. 웬만한 입문 단계의 위스키는 다 마셔 보았으니, 자연히 명성이 높은 위스키에 관심이 갔다. 하지만, 캐나다는, 그 중에서도 온타리오 주는 생각만큼 위스키를 다양하게 수입하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외국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을 통해, 다른 주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을 통해 원하는 것을 구했는데, 그 중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Springbank 15년산이다.
기사에서도, 유튜브에서도, 잡지에서도, 여기 저기서 좋다고 난리인데, 온타리오주는 물론이고 캐나다 어디에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나 미국에서 오는 사람들도, 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도 이 술은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가끔 서민용 (가격이 크게 비싸지 않은) 위스키 경매에 나오기는 하는데, 그래도 낙찰가는 내가 지르기로 작정한 수준을 한참 넘어가기 때문에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알버타 주에서 열리는 경매에서 이 술이 이상하리만큼 많이 나온 것을 발견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이 풀렸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입찰을 했는데, 덜컥 두 병이 같이 있는 lot를 낙찰을 받았다. 아니, 이게 진짜인가? 믿을 수 없었다. 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병 값으로 두 병을 건졌으니, 나름 횡재였다. 온타리오 주로 가져와서 한 병만 다시 경매에 팔아도 본전은 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드디어 이 위스키의 맛을 알 수 있다는 생각에, Springbank 15년산을 두 병이나 낙찰받은 그 날은 하루 종일 행복했다. 아내의 잔소리도 고객의 불평도 내게 아무런 스트레스를 주지 못했다. 그 날 뿐이 아니다. 다른 주에서 배달을 받는 것이라서 그 두 병이 우리 집에 도착하기까지 2주 정도 시간이 걸렸는데, 그 기간 내내 내 마음은 바다처럼 넓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두 병을 받은 날, 내 기쁨은 극에 달했고, 그래서 그 두 병이 들어있는 박스를 끌어안은 상태에서의 내 환희가 고스란히 담긴 내 얼굴을 아내가 사진을 찍어 놓았다가 내 허락없이 카톡방에 공개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내 기쁨은 그 날에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술을 본 딸이 비싼 술을 샀다면서 하도 난리를 쳐서 나는 병 뚜껑을 열지 못했고, 다시 경매에 팔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2 병을 고이 모셔 놓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도 계산이 있었다. 2병을 다 팔겠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한 병은 몰래 마시고 한 병은 팔면 거짓말은 아니라는 얕은 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래도 딸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3개월 정도 기회만 보았다. 그 3 개월 내내 내 마음은 기대로 두근거렸고, 나는 가족에게, 직원들에게, 고객에게, 거래처에게 참으로 자애로운 변호사였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행복한 변호사"라고 하지만, 나는 행복한 변호사였고,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토론토에서 가장 기쁨 넘치는 변호사였을 듯 싶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딸은 수련회를 갔고, 나는 그 틈을 타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짜잔! 하고 병을 개봉했다. 그리고 우선 향을 음미하려 했다.
근데, 어라..., 일단 향이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peat 향이 강한, 소위 병원 냄새가 독한 위스키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Springbank 15년산은 생각보다 병원 냄새가 독했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한 모금을 입에 물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마셔보니 Springbank 15년산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peat 향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내 취향이 확실히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이 술이 생산되는 지역이면 당연히 peat 향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어야 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그 생각이 도대체 왜 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이 위스키가 너무 좋다고 말하던 어느 누구도 이 술의 peat 향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었고, 나는 그저 좋다니까, 귀하다니까 쫓아다녔다. 한 번도 어떤 술일지 스스로 알아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하니, 가장 기본적인 생산지에 대한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산꼭대기에 오른 후에야 "어라, 이 산이 아닌게벼" 라고 말하는 꼴이 되어 버린거다.
그 첫 잔 이후로 나는 Springbank 15년산에 다시 손을 대지 않았고, 바로 그 날, 4개월간 지속되던 나의 기쁨은 사라졌다. 차라리 그 돈으로 맥주를 샀다면 아직도 금요일마다 기쁘게 한 잔을 하고 있을텐데.
그렇게 실제로는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를 나는 알았고, 그런 기쁨이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지는 지도 알았다. 그야말로 한 여름 밤의 꿈이었다.
한국에는 취업 희망자들의 꿈의 직장이라는 곳이 있단다 - 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 민족. 이름하여 네카라쿠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 회사들에서 사표를 쓰거나 이직하는 비율도 그 인기 만큼이나 높다고 하니 어찌보면 이상한 일이다. 꿈꾸던 곳에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가는 것일까.
내가 아는 어떤 이도 작년에 아들이 네카라쿠배에 합격하고서는, 아들과 함께 손을 맞잡고 환호성을 질렀다고 했다. 하지만, 그 아들이 사표를 던지는 데에는 1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월급은 문제가 아니었다는데. 그럼 뭐가 문제일까? 그 아빠는 이해하기 어려워 했다. 글쎄, 모르기는 몰라도 아마도 그 동안 아들이 꾸어왔던 꿈이 사실은 그의 꿈이 아니고 다른 누군가의 꿈이거나, 아니면 꾸고 있던 그 꿈이 어떤 꿈인지도 모르고 꾸었다는 뜻은 아닐까.
마치 내가 Springbank 15년이 peat 향 가득하다는 것도 모르면서, 첫 한 모금을 마시는 그 순간까지 매일매일이 꿈꾸는 것 같았던 것처럼.
그래도 난 얻은 것이 술이라 참 다행이다. 주위에 Springbank 15년산을 한 번 마셔보고 싶은 위스키 초보자는 널렸으니, 개봉한 술은 기회 보아 생색내면서 한 잔씩 돌려 인심을 사면 되고, 개봉하지 않은 술은 다시 경매에 내 놓으면 그만이다. 금전적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니, 투자 결과로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투자한 것이 내 시간과 내 노력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얻은 것이 나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성취이고 또 남에게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나만의 후회라면, 그건 누구에게 팔 것인가. 짧게나마 행복했던 것으로 퉁 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