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에세이
누구에게나 여행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처음 갔던 놀이동산부터 세계 여행까지.
가장 좋았던 여행,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여행, 마음이 잘 맞거나 맞지 않았던 친구나 가족과의 여행 등 여행의 추억을 꺼내 놓는다면 서로의 이야기를 듣느라 밤을 새울 수도 있다.
특히 여행광인 사람들에겐 여행광이 된 계기나 여행의 의미 등 특별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나는 여행광에 가까운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미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일년에 해외로 나가는 비행기를 최소 3번 이상은 탔다.
나의 특별한 여행이야기를 조금 꺼내자면, 박사과정이 끝날 무렵부터 시작된 ‘연주 여행’이다.
가족, 친척들과 다녔던 여행에 대한 기억도 너무 소중하지만, 자연스럽게 여행의 묘미를 알게 해 준 연주 여행은 연주가 없어도 틈만 나면 날 움직이게 했으며,
날 여행광으로 만든 계기가 되어주었다.
박사 과정이 끝날 무렵 친한 피아니스트 언니와 미국의 여러 주의 콘서트 시리즈가 있는 곳에 오디션을 보고 연주를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시카고, 보스턴, 뉴욕, 샌디에이고, LA, 샌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 플리 미스 등등 정말 많은 도시를 다녔다.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1-2번씩 미국으로 연주 여행을 갔으며 많게는 한 번의 연주여행에 2-3번씩, 한 해에 4곳을 돌아다니며 연주를 하기도 했다.
처음엔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학교가 아닌 장소,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연주장, 그 지역의 미국 신문 등에 나오는 연주 기사 등 많은 부담감은 여행이란 것과는 아주 다른, 하나의 일정 정도로 생각이 되었었다.
그러나 첫 연주 여행의 시작이 된 보스턴 연주부터 연주 “여행” 이 되었다.
연주 전까지는 긴장하고 떨고, 연주 직후엔 '더 연습할걸' 하는 후회는 딱 30분 정도만 하고는 바로 새로운 동네의 탐험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연주를 하긴 하는 행복한 ‘연주 여행’이 되었다.
연주여행의 가장 매력적이었던 것은
시간이 갑자기 천천히 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주는 편안함이었다.
한국에서 아침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익숙한 동네, GPS 없이도 예상이 가능한 길이 막히는 구간까지,
예측이 가능한 똑같은 일상을 살다가
단 하루상간으로 갑자기 마주하는 낯선 동네,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 낯선 상점들...
모든 것이 낯설어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이 ‘낯섦'이 주는 느낌은
마치 매일 똑같은 일상을 지나는 길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회중시계를 들고 늦었다고 뛰어가는 조끼 입은 토끼'를 따라 들어간 굴속에서 천천히 가는 시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손에 넣는 순간부터
갑자기 시간이 ‘천천히’ 가는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에게 연주여행은 매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를 만나는 것 같은 신비로운 세계여행이었다.
매번 토끼의 느리게 가는 시간의 공간으로 들어온 것 같은 여유로운 연주여행은 내가 한국에서 몇 달을 열심히 살아내는 원동력이 되었었다.
연주를 끝내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낯선 아름다운 도시를 돌아다니다
시계를 반납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온 힘을 다해 시계를 쥐고 버티다가
매번 공항에 늦게 도착했다.
공항의 노약자를 위한 전동 차는 거의 모든 공항에서 타 본 거 같다.
프린트한 비행기 티켓 종이를 내밀며, 비행기 시간을 소리치면 입구에 계신 노약자를 위한 전동차 운전자 아저씨께서 “너희 엄청 즐거운 시간을 보냈구나!” 하시며 화려한 사이렌 불빛을 번쩍이며 우리를 현실의 세계, 수속 카운터로 데려다 놓으셨다.
2018년 미국 연주를 며칠 앞두고 악기 체크업을 맡긴 곳에서 내 악기를 떨어뜨려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사고가 있었다. 그 이후 미국에서 예정됐던 모든 연주를 취소하고 몸과 마음을 다쳐 2년 6개월이 넘게 악기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 팬데믹까지 겹쳐 미국의 연주여행을 멈추었었다.
지난달 7월,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 지역에 연주를 하러 다녀왔다.
연주여행 때마다 사용하는 양어깨로 매는 비행기 탑승용 바이올린 케이스를 매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
예전 같은 설렘보단 긴 시간 행복하게 다녔던 오랜 시간의 연주여행이 떠올랐다.
솔직히 이번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토끼가 나에게 오진 않았다.
대신 내가 행복했던 과거로 떠나는 여행같이 느껴졌었다.
연주여행을 멈췄던 긴 시간 동안 연주여행을 할 수 있었음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너무 그리웠었다...
내게 여행이란 시간이 천천히 가고 있는 회중시계를 잡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