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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an 15. 2022

원치 않은 가족, 맞지 않은 룸메, 들이지 않은 세입자

동거의 시작

 나는 자아조차 없는 3종 세트 침입자에게 어느새 원망을 가진 못난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이 살아가려면 우린 몇 가지 규칙이 필요했다. ‘우리’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나만 지키면 되는 규칙이었다. 쟤넨 자아 따윈 없는 침입자니까.     

 


 첫 번째, 원망 덜어내기.

 내게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같이 살아갈 대상에게 남은 증오심을 빨리 덜어내야 했다.


 두 번째, 사람처럼 대하기.

 대인관계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물론 저 침입자들은 사람이 아니고 대인관계 스킬이 모두 해당하지 않을 거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만 적용했다.      


 적당한 선 지키기. 너무 가까워지지도, 너무 멀어지지도 않는다.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아름다운 관계가 된다. 침입자와 가까워져 잠식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멀어지려 하면 쓸데없는 원망만 쌓일 게 분명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유명한 양파 실험이랑 같은 맥락이다. 예쁜 말만 듣는 양파랑 나쁜 말만 듣는 양파의 성장을 비교했더니, 예쁜 말만 듣는 양파의 성장이 더 좋았다는 이야기. 그래서 “바르고 고운 말을 쓰자”가 실험의 교훈이었다. 나는 다르게 이용해보려 한다. 양파도 자아가 없는데 우리 침입자들도 자아? 없다. 그럼 통하지 않을까? 진심이 우러나오지 않아도 어금니를 물고서 해야 한다. 읍읍읍!!     


 세 번째, 약 잘 챙겨 먹기.

 침입자는 내 안에서 계속 튀어 오르는 탱탱볼 같다. 규칙성 없이 막무가내로 뜀박질을 반복한다. 절대 쉬지 않는다. 얕게 뛰거나, 높게 뛰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걸 조절하기 위한 약이 필요하다. 이건 거리를 유지하거나, 예쁘고 고운 말을 쓴다고 해서 조절되는 영역이 아니다. 의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히포크라테스 만세.     

 

 네 번째, 가끔은 져주기.

 앞선 규칙을 지켜도 힘든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럼 그냥 냅다 누워있기로 했다. 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지금은 내가 가장 중요하니까. 미래의 나 화이팅!     

 

 다섯 번째, 규칙 못 지켰다고 스트레스받지 말기.

 사람은 불완전하므로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는,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야.” 

    

 괜한 걸로 스트레스받지 말자. 10중에 5를 지키다가 나중에 8을 지키면 성공이다.      

 

 여섯 번째, 인정하기. 하지만 내 탓이 아님을 명심하기

 내 우울과 불안 뿌리가 침입자들이 쉽게 들어오게 한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순전히 그게 내 탓인가! 환경적인 이유도 있고, 우연도 있고, 사주팔자에서도 그때 삼재라고 했고... 그렇게 이유라고 뜯어보면 수백 가지가 나올 테다. 뿌리를 어떻게 바꿀 수 있나.    


‘그저 일어난 상황이다’     


 무단 침입당하고 힘들어하던 나를 버티게 하던 문장. 내 뿌리를 알고 무너져버렸던 문장. 이젠 멋지게 재건했다.      


 솔직히 말로만 침입자, 뿌리 이렇게 비유했다만, 결국은 우울증, 공황장애, 간질 3종 세트에다 기질적으로 우울과 불안이 많은 사람이 살아보겠다고 적는 글이다. 이 규칙으로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병을 앓아본 경험도 처음이고, (읽어보진 않았지만) 몇몇 에세이를 읽어도 ‘질병’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잘 나오지 않아서 이 방법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가 정한 규칙으로의 동거 시작이다. 태어나서 동거를 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형태도 없는 것들이랑 할 줄은 더 몰랐다. 평생 같이 갈 거라곤 더더욱 몰랐다. 어찌어찌 살아보려 한다. 시작부터 삐걱댈 상황이 그려진다. 우당탕탕 큰일이 나기도 할 거다. 같이 살자고 한 적은 없지만, 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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