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딸 콤플렉스의 시작
어느 날 막 대학 입학을 한 언니가 책을 한 권 사 와서 읽고 있었다.
책 표지도 정확이 기억난다. 고통받는 혹은 고뇌에 빠진 여성의 얼굴이 전면으로 나오지 않고 잡지책 찢기듯 일정 부분만 어두운 색감을 입혀져 누가 봐도 무슨 사정 일지 궁금해지는 그런 표지였다. <일곱 가지 여성 콤플렉스>라니 그렇다면 나에게는 어떤 콤플렉스가 있을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문득 나 자신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언니는 ‘맏딸 콤플렉스’ 때문에 이 책을 사게 되었구나. 책을 읽을수록 나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사정으로 이 책에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를 외치던 1974년도에 언니가 태어나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캠페인이 벌어지던 때 1977년에 둘째인 내가 태어나고 셋째가 태어나던 1980년에는 엄마, 아빠는 이미 국가에 민폐가 되는 국민이었다. 그러다 오매불망 손녀 말고 손자를 10년 넘게 외치신 할머니 등살에 부모님은 한번 더 민폐를 저지르게 된다. 결국 할머니의 바람대로 1986년에 남동생이 태어나고 비로소 우리 가족도 산아제한 정책에 뒤늦게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우리 부모님은 많은 일꾼을 국가에 보탠 애국자로 변했지만 그 당시에는 가족이 많은걸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고 어렸던 나는 형제자매가 많은 게 항상 부끄러웠다. 예전에는 왜 그렇게 학교에서 집안 사정 조사를 서면이 아닌 교실에서 손을 들고 하게 했을까? “언니 있는 사람?” 손을 든다. “여동생 있는 사람?” 두 번째 손을 든다. “남동생 있는 사람?” 휴우.. 이제 끝났다.. 고개를 내리고 마지막 손을 든다. 나처럼 세 번이나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막내와 나는 아홉 살이나 차이가 나고, 만삭의 몸으로 내가 3학년일 때 학교 면담에 오셨던 건 진짜 창피했었다는 생각이 난다.
그렇게 바라시던 손자의 성대한 돌잔치가 끝나고 연세가 많았던 할머니는 생전 소원을 이루었다 여기신 탓인지 기력이 쇠하시더니 몇 달 누워 계시다 자손들이 호상이라 느끼게 하고 싶으셨는지 본인 생일에 돌아가셨다. 일제 시대와 한국전쟁통에 다른 아이들을 잃고 하나 남은 막내인 아빠를 귀하게 키우셨던 할머니를 잃은 아빠는 여간해서 어른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오열을 하시며 초상을 치르셨고 선산에 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위경련을 일으키셨다.
초상을 치르며 너무 기력을 쓰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이 심해서 일 거라 엄마는 생각을 하셨지만 병원을 다녀오신 후 단순한 위경련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셨다고 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처음 병원을 다녀오신 이후로도 여러 번 병원을 가셨던 것 같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꽃이며 과실나무가 많은 넓은 정원이 딸린 큰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큰 감나무가 두 그루나 있고 아름드리 앵두나무도 두 그루나 있는데 아빠는 엄마가 좋아하는 보라색 라일락 나무를 사다 심고 정원 관리를 열심히 하셨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88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한참 증권이 활황이었던 시기 증권회사 지점장이셨던 아빠는 원래 밤이 되어서야 집에 오셨는데 이사를 한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회사에는 거의 가지 않으시고 집에 계시는 날이 많았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시며 시간을 보내셨던 것 같다. 큰집으로 이사를 하고 전학 수속을 밟고 우리 자매들은 한동안 우리끼리 동네를 탐색하러 다녔고 그 와중에도 부모님은 병원을 왔다 갔다 하셨던 거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강남 성모병원을 다니셨던 부모님은 병원의 거리와 만일에 집을 비우게 될 때 아이들이 지내기 안전한지, 아빠가 떠날 경우를 대비해 살기 좋은 곳을 따져서 방배동으로 이사를 하신 거 같았다. 그렇게 이사한 집에서 2년을 못 사시고 아빠는 일찍 하늘나라로 가게 되셨고 그즈음부터 나의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시작이 된 거 같다.
2년이 안 되는 아빠의 짧은 투병생활이었다 해도 방학이 되면 엄마 혼자 남편에 아이 넷을 케어할 수 없었다. 그럼 방학 동안 내가 막내 동생을 데리고 안동 외갓집으로 내려가서 할머니와 같이 지냈다. 4학년 겨울 처음 동생을 데리고 안동을 갔을 때는 동생이 아주 어려 밥도 먹여줘야 하고 포대기로 업어서 재워야 하는 시기였다. 외할머니와 고조할머니가 같이 계셨는데 나중에 엄마에게 지도 어린것이 동생이 아프거나 칭얼대면 업고 재우는 게 대견하기도 맘이 짠하기도 했다고 하셨단다. 내가 아이들을 키워보니 4학년은 너무 어린 나이인데 그때의 나는 그 이전부터 내가 굉장히 성숙해있다 느꼈고 엄마를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이 낮잠을 자면 집 앞 과수원에 가서 사과나무 밑에서 나는 냉이를 캐며 시간을 보내다가 동생이 깼다는 할머니의 부름에 집으로 달려가곤 했던 기억이 많이 난다. 어린 내가 냉이를 좋아했을 리는 없고 동생이 자는 그 짬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할머니의 저녁거리 반찬에 도움이 되려고 했던 것 같고, “아이고 장하다, 이렇게 많이 캤네”하며 칭찬을 들으면 더 칭찬을 받으려고 매일 그렇게도 산으로 뛰어갔었나 보다. 그곳은 집성촌 인지라 다들 이웃 사정을 훤히 알고 있다 보니 길을 다니면 “네가 누구 딸 이제?”하며 와서 알아보고 과자 좀 먹고 가라 하시고 그렇게 이 집 저 집 드나들며 돼지우리도 구경 가고 동네 할머니들과 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동생을 그렇게 잘 돌본다며?”, “네 엄마는 네가 있어 좋겠다”는 시골 어른들의 칭찬이 나를 길들이기 시작했고, 엄마를 도우면 칭찬을 많이 받는다는 각인이 되었던 거 같다.
금슬이 워낙 좋았던 두 분이라서 남편을 일찍 보낸 엄마는 무척이나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1, 초등 6, 초등 3, 네 살배기 아이들이 주르륵 있고 어린아이들을 두고 일을 나갈 수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을 것이다. 엄마 나이 41살 이야기다.
병원을 오가며 생활하셨을 때에도 우리 사 남매를 케어해주시는 분은 항상 집에 계셔서 나는 엄마, 아빠랑 보내는 시간 말고는 다른 건 부족함 없이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그동안 못 챙겨주셨던 걸 만회하고 싶으셨는지 아빠의 부재를 잊고 싶으셨는지 상을 치르고 집에 오고 나서부터 관심을 오롯이 우리 사 남매에게 쏟으셨다. 그 이후부터 엄마는 항상 대량으로 음식을 해서 우리를 먹이고 그동안 도움받았던 분들에게 나눠주시고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셨다. 힘든 티를 내시지는 않았지만 눈치가 있었던 나는 엄마가 외롭지 않게, 혼자 우리를 책임져야 하는 게 힘들지 않게 어찌하든 엄마 옆에 붙어서 콩나물을 같이 다듬거나 빨래를 개거나 등의 집안일을 했던 거 같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언니는 이때부터 자신이 맏딸로 우리 집에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워낙에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지만 언니는 더욱더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공부를 잘해서 나중에 엄마처럼 혼자가 되었을 때 살아남을 수 있게 전문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한 것 같다. 더불어 그렇게 되면 언니는 엄마의 자랑이 될 수 있으니 내가 착한 딸이 되어 엄마를 기쁘게 해 드려야지 했던 것과 일맥상통한 것 같다. 지금에 와서 보면 언니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맏딸이 되었고 자신의 커리어도 잘 이어 나가고 있다. 착한 딸 콤플렉스 말고 다른 방법으로 엄마를 기쁘게 해 드렸으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까?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는 아침이다.
2021년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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