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혹은 채찍
"잠깐만 이리 와봐, 너 게이밍 키보드 갖고 싶댔지?"
학교에서 돌아와 손을 씻고 있는 둘째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게이밍 마우스랑 헤드폰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대답하는 아들.
그럼에도 다른 때는 말도 못 꺼내게 하는 게임을 엄마가 먼저 얘기하다니 뭔가 이상한 분위기임을 느꼈는지 의심 어린 눈으로 나를 계속 보고 있다.
"엄마가 딜을 하나 제안할 거야. 네가 원했던 거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뭔지 먼저 얘기해봐."
이 놈도 이제 다 컸다. 예전이면 덥석 물었을 보상인데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단다.
"오늘부터 2학기가 시작되었으니 1학기와는 다르게 숙제만 하지 말고 네가 해야 할 일, 예를 들어 매일 책도 읽고 (부모가 안 시켰는데 책 보는 아이가 세상에 있긴 한 거죠?) 혼자 공부를 좀 했으면 좋겠어. 학교를 옮기는 일은 힘든 일이니까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럼.. 키보드 필요 없어!" 쿨하게 대답하곤 방으로 들어간다.
'이럴 줄 알았다. 혹시나 넘어오려나 찔러본 건데, 영특한 것!'
네가 조건을 갖추면 너에게 이만큼을 약속하겠단 엄마의 공약은 설득력이 없었다. 안 해도 잃을 것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 보상 없이 오늘부터 엄마랑 같이 공부해야지, 오늘 숙제가 뭐야?"
들어오려는 엄마를 막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아직은 내 힘이 더 세지.. 결국엔 나도 책상 옆에 앉았다.
오늘 숙제는 혼자 1시간 30분가량 비디오를 보고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 시대로 접어드는 문명 성장과정에 대해 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엄마가 같이 보면서 잘 알려줄게"라고 했으나 나는 영어로는 배워본 적이 없으니 못 들어 본 고유 단어들이 나올 때마다 오히려 아들에게 물어봐야 했다.
대답을 들을 때마다 "우와~이거 어떻게 알았어? 와~대박! 잘하고 있네! 이렇게 같이 영상 보며 얘기하니까 엄마가 너한테 배우는 게 많네! 너 덕분에 이 단어도 알게 되었네" 라며 칭찬도 하고 설명도 잘 들으며 두런두런 얘기를 했다. 평상시 아들이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삐딱하게 앉아서 공부하면 안 하는 거지'를 외치며 '제대로 앉아서 해!'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내 생각이 틀렸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구나',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깨달았다. 오랜만에 아들 방에 그렇게 오래 머물러 본거 같다.
요즘 부쩍 방에 들어가서 무슨 숙제하는지, 학교에서 어떤 걸 배우는지 물으면 엄마는 몰라도 된다고 혼자 할 수 있다며 나가라고 얘기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딸아이 같은 경우는 내가 묻기도 전에 "엄마, 이거 알아? 나 요즘 이거 배워"로 시작해 자기는 잘하고 있는지 자기 친구 누구는 어땠는지까지 얘기를 하는데..
정말 딸, 아들 차이가 이렇게 큰 건지, 이 아이들의 성향 차이인 건지 나로서는 어떻게 양육을 해야 하는지 도통 감이 안 잡혔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딸에게는 맛있는 당근을 틈틈이 주었던 것 같고 아들에게는 갖은 협박과 일방적인 명령 그리고 '너를 위한 길'이라 포장했던 채찍만 주었던 것 같다.
그날 밤, 아들이 엄마랑 같이 자고 싶다며 자기 이불이며 베개를 들고 안방으로 왔다.
다른 날이랑은 달랐을 나의 칭찬과 인정. 아들도 뭔가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다 큰 애가 무슨 엄마랑 자? 그냥 니 방에서 자라고!"라 말하면서도 오랜만에 느끼는 친밀함 때문인지 그동안의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이부자리를 봐주고 있었다. '오늘 같이 공부하는 시간 보내서 좋았다'라고 '이제 엄마도 나이스 하게 말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약속하며 누으려는 찰나,
"내일 테스트가 두 개 있으니 일찍 깨워줘!"
"뭐라고? 테스트가 두 개? 근데 오늘 시험공부 안 했잖아? 어이구 당장 노트 안 가져와?!" 진짜 채찍이 없었을 뿐 말 그대로 등짝을 치고 말았다.
그렇게 오후부터 내내 생각했던 나의 새로운 약속은 침대에서의 마지막 굿 나이트 인사말 한 마디 때문에 어디론가 가버리고 우리는 잠들기 전까지 또 다른 당근과 채찍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없으니 공약 실천이 대통령에게도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