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걱이 지나간 자리엔 흔적이 남는다

무한 변신의 귀재 우엉조림

by 카인드마마

주부 14년 차.

나는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우리 집에서 내 주요 보직은

삼 남매의 끼니를 책임지는 작전본부장이다.

무급이지만, 연중무휴다.


입맛 다른 삼 남매는 어제 본 반찬을 오늘 또 마주하는 법이 없다.

누구를 탓하랴. 그들의 미각을 이토록 까다롭게 길러낸 것은 결국 나인 것을.


꼼수가 필요하다.

한번 해서 맛있게 먹고, 다음번에는 약간 변형해서 다른 반찬처럼 먹을 수 있는 메뉴.

우엉조림은 그중 하나이다.


나의 우엉조림에는 단맛 삼총사가 산다.

흑설탕은 진한 갈색의 옷을 입히고,

물엿은 맛의 중심을 잡으며,

마지막에 조청은 은근한 뒷맛과 보석 같은 윤기를 책임진다.

단맛이 과하다 놀라지 마시라.

오늘 하루도 수고한 삼 남매에게 이 정도의 다정함은 허락되어야 하니까.


우엉을 조릴 때는 인내가 필수다.

주걱이 지나간 자리에 간장 양념의 '길'이 보일 때까지,

끈기 있게 불 앞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 쫀득한 식감을 허락받을 수 있다.

끝까지 기다리다 불을 끌 '적기'를 알아채는 일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가능하다.

적당한 육아의 지점을 찾기 위해 매번 초보 엄마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처럼.


우엉이 다 조려질 때 쯤되면 방에서 한 명씩 코를 킁킁대며 나오기 시작한다.

이 냄새는 아이들에게 일종의 소집 명령이다.

조청이 코팅된 우엉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나 좀 먹어보라며 아이들을 유혹한다.


달콤 짭조름한 우엉조림은 만든 첫날 내어주면 아이들이 잘 먹어준다.

하지만 다음날은 여지없이 찬밥 신세.

작전을 세워야 한다.


첫날은 반찬으로.

다음날은 잘게 다져서 주먹밥을 만들자!

유부초밥에 넣을 밥에도 다진 우엉을 섞으면 아이들의 눈이 커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아이들이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면 볶음밥에도 살짝 넣어보자.

킥은 주말이다.

우리 집 김밥귀신들이 환장할 우엉김밥 되시겠다.

마트에 파는 김밥용 우엉조림과는 비교 불가다.

반찬으로 만들어 두었던 우엉을 부드러운 계란과 함께 듬뿍 넣어주면 다른 재료가 하나도 필요 없다.

한 번의 우엉조림으로 김밥까지 도착했다면,

작전성공이다.


작전의 핵심은 '거리두기'다.

우리 집의 까다로운 VIP 고객들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다.

하루는 반드시 걸러야 한다.

우엉이 잠깐 잊힐 때 즈음, 주말의 김밥으로 화려하게 엔딩을 만드는 것.

그것이 작전본부장인 내가 식탁의 평화를 유지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김밥은 꼭 주말이어야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김밥은 주말에 더 맛있어 보이나 보다.

그렇지.

여차하면 김밥도시락 싸들고 나들이가 가능하니 내 입장에서도 주말이 정답이다.


이번 주도 성공했다는 승리감에 취해 있을 때 즈음,

친정아빠가 며칠 전에 한 말이 생각난다.

"니는 가정기업 CEO 아이가~"

우리 아빠 유머를 어쩌지.

그런데 또 속 없이 기분이 좋다.

맞는 말이다.

우리 집엔 요리사보다 전략가가 필요하다.

요리는 거들뿐.


오늘도 나는 들키지 않았다.


우리 집의 평화는 주걱이 남긴 저 진득한 흔적처럼, 쫀득하고 달콤하게 유지되었다.


그래서,

우엉조림은 못 참지.




<삼 남매네 우엉조림 레시피>

1. 찬물에 다시마 한 조각을 담가 다시마물을 만든다.

2. 우엉을 채쳐 식초물에 담가둔다.

3. 우엉을 헹궈 웍에 담고 다시마물을 우엉이 자작하게 잠길 정도만 넣는다.

4. 간장 5스푼, 흑설탕 2스푼, 맛술 1스푼을 넣고 강불에 바글바글 끓인다.

5. 간장물이 끓으면 물엿 1스푼을 넣고 중불로 줄인 후 한 번씩 저어가며 졸인다.

6. 간장물이 거의 없어지려 할 때 조청 1스푼으로 윤기를 더 한다.

7. 주걱이 지나간 곳마다 간장길의 흔적이 선명해지면 불을 끄고 통깨를 뿌린다.

•단맛은 조림 국물을 맛보며 취향에 맞게 가감해 주세요.


<작가의 노트>

우엉을 조리는 일은 육아와 닮았다. 주걱이 지나간 자리에 선명한 길이 보일 때까지, 끈기 있게 불 앞을 지켜야만 쫀득한 진심을 허락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주방에서 기다림이라는 가장 어려운 요리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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