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칼진 묵은지가 요조숙녀가 되는 시간, 삼 남매네 김치찜
식사 준비의 우선순위는 늘 아이들이다.
덕분에 남편은 늘 '삼삼함'과 '심심함'의 그 어디쯤의 식탁 앞에 앉아야 한다.
오늘은 고군분투하는 나의 착한 동료를 위한 요리를 해 보기로 한다.
김치찜이다.
김치찜은 아직 어린 삼 남매가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오직 그대만을 위한 메뉴.
큼직한 돼지갈비 두대에 묵은지 두 덩이를 얹으며 다짐한다.
"오늘은 오직 그만을 위한 시간을 끓여내리."
김치찜에는 요행이 없다.
그대를 향한 내 20년의 세월처럼 뭉근하게 끓여내야만 한다.
연애시절의 풋내를 지나, 치열한 육아의 증기 속에서,
우리의 사랑과 우정, 전우애가 냄비 안에서 감칠맛으로 승화된다.
김치가 너무 시면 싫어하는 남편을 위해 김치를 물에 살살 씻어 잠시 담가둔다.
하지만 그 물은 절대 버려서는 안 된다.
고기 위에 씻어낸 김치를 올리고 김치 씻은 물을 육수 삼아야 진정한 김치찜이 되기 때문이다.
김치 신 것이 싫어 씻어놓고, 그 물을 다시 쓰면 무엇이 다르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한번 해보시라.
까칠했던 묵은지가 요조숙녀가 되어,
얼마나 적당한 양념을 머금고 익어가는지 먹어보지 않으면 모를 맛이다.
그것은 마치 서로의 모난 부분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결국은 그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20년의 관계와 같다.
평소에는 설탕에 인색한 나이지만,
이번만큼은 설탕요정으로 빙의를 해야 한다.
김치의 앙칼진 신맛을 잡아주는데 설탕만 한 것이 없으니까.
내 돌직구 사랑처럼.
까메오같은 코인육수 2알과 맛간장으로 빈 맛을 채우고, 대파와 양파를 듬뿍 넣어 뚜껑을 덮어둔다.
한소끔 끓어오르면 중불로 줄이고, 인내의 시간을 가진다.
육수가 졸아들어 김치찜이 짜질 위기가 될 때쯤!
물을 추가하며 화난 김치찜을 달래어야 한다.
김치를 두덩이나 넣었는데 짜지면 그것으로 몇 끼를 먹어야 할지 계산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의 애타는 기다림 후에야,
달큼하면서도 톡 쏘는, 부드럽고 깊은 묵은지의 진가가 나타난다.
어설픈 수육은 명함도 못 내밀 김치찜 속 고기는 그 자체가 주인공이어도 손색이 없다.
푹 익은 묵은지와 고기가 남편의 입속으로 들어가 녹아내리는 상상을 하다 보니, 언제 퇴근하나 시계를 자꾸 쳐다본다.
그의 퇴근을 기다리는 사이, 나의 주방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또 다른 작전이 시작된다.
이런 날 아이들은 특식이다.
한식파 아빠가 즐기지 않는 메뉴를 할 절호의 기회.
오늘은 명란크림파스타다.
짭짤한 김치찜 냄새와 고소한 명란크림소스의 냄새가 절묘하다.
남편 앞에는 투박한 김치찜 그릇이 놓이고, 아이들 앞에는 귀여운 파스타 접시가 놓일테다.
서로 다른 취향이 한 식탁 위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소란스러운 저녁.
이 냄새들의 조화가 오늘 내가 내린 가장 다정한 정답이다.
띠띠띠띠 띠띠띠띠.
아빠 오셨다~~~~!
신발도 채 벗지 못한 남편의 상을 서둘러 차려낸다.
김치찜과 뜨끈한 밥 한 그릇, 그리고 조미김이면 충분하다.
오늘도 수고한 남편은 김치찜 하나에 밥 한 그릇을 뚝딱하고, 남은 것은 내일 또 먹을 테니 절대 버리지 말라는 예쁜 멘트를 한다.
마침 눈 오는 겨울밤이다.
오늘의 메뉴가 차가운 겨울밤과 그렇게 어울릴 수 없다.
여보,
오늘도 수고했어요.
<삼 남매네 김치찜 레시피>
1. 큰 볼에 물을 받아 묵은지를 살살 씻어낸 후 잠시 담가둔다.
2. 큰 웍에 고기를 양껏 깔고, 그 위에 씻어낸 묵은지를 올려준다.
3. 1의 물을 2의 웍에 김치가 완전히 잠기도록 충분히 넣어준다.
4. 강불로 올리고 양파는 한 개, 대파는 듬뿍 넣어준다.
5. 코인육수 2개와 맛간장 2스푼, 맛술 1스푼, 설탕 3스푼을 넣고 뚜껑을 닫는다.
6. 바글바글 끓어오르면 중불로 내린 후 한시간 가량 끓여준다.
7. 이때, 중간중간 열어보며 물이 졸아들면 생수를 추가해 준다.
8. 흥건하던 물이 자작자작해지고, 고기와 김치가 젓가락만 대도 결대로 찢어질 만큼 부드러워지면 완성이다.
! 김치의 상태에 따라 신맛과 짠맛의 차이가 있으니, 물과 설탕의 양은 간을 봐가며 조절 해주세요.
<작가의 주방노트>
김치를 씻어내는 것은 비우는 과정이고, 그 물을 다시 붓는 것은 채우는 과정이다.
김치찜의 맛은 그 비움과 채움의 경계에서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