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관찰자 시점

엄마는 감독에서 매니저로 물러났다

by 카인드마마

나는 감독이었다.

아이들의 생활 습관과 공부 스케줄을 관리했다.


계획을 짜고, 시간을 체크하고, 잘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일.

수정이 필요하면 개입했고, 흐트러지면 다시 줄을 세웠다.


“엄마, 오늘은 뭐 해야 해?”


그날따라 아이의 질문에 마음 한쪽이 뜨끔하고 불편했다.

감독으로서의 자아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마음속 말풍선에서, 차마 아이에게는 들려줄 수 없는 대사들이 떠다닌다.


수학 단원 평가에서 늘 백 점을 받기를.

학원 다니는 친구들에게 영어가 밀리지 않기를.

이해하지 못해 남겨지는 문제가 없기를.


그런 학교 성적으로 엄마의 노력이 증명되기를.


온통 욕심이다.

아이의 것이 아닌, 엄마의 욕심.


그렇게 1, 2학년을 끌고 오면서 아이는 내가 원하는 점수를 받아 왔을까?

애석하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수학 점수는 늘 기대에 못 미쳤고, 영어실력은 내놓을 수준이 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해 남겨진 문제들도 수두룩 했다.


그렇게 아이의 능력과 상관없이 엄마의 기준에서 아이를 평가했다.

아이에게 엄마의 기대를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엄마의 눈빛은 아이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마음을 달리 먹어보기로 했다.

평가의 기준을 엄마에서 아이로 옮겨가니 전혀 다른 해석이 되었다.


집공부만으로도 수학 단원평가에서 종종 백점을 받아 왔다.

영어학원을 다니지 않았는데도 챕터북을 혼자 소리 내어 재미있게 읽는다.

심화문제는 선행을 기반으로 한다. 선행하지 않은 아이가 심화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대신 아이는 책을 좋아하고 항상 곁에 두고 산다.


그래,

이제 결심의 순간이다.

아이가 내게 잠시 맡겼던 삶의 주도권을 아이에게 다시 돌려주기로 했다.


나는 아이와 마주 앉아 말했다.


"엄마는 그동안 너에게 감독이나 코치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

잘하는지 지켜보고, 틀리면 고치고, 속도가 느리면 재촉하는 사람.”


아이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감독의 역할은 그만하려고 해.

너도 이제 열 살이니까.”


잠깐의 침묵이 공기를 무겁게 했다.


“그럼 이제 나 혼자 해야 해?”


아이의 질문에는 막막함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럴 리가. 대신 엄마는 너의 매니저가 되어 줄게.

매니저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 줄 아니?"


"응. 매니저는 같이 달려주는 사람이야."


"맞아. 이제 너 혼자 뛰라고 하지 않을게. 너와 함께 뛰어 주는 사람이 될 거야."


엄마의 말에 아이의 입꼬리가 실룩실룩 반응하는 것이 보인다.

아이는 곧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환영했다.

아이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너의 계획이 없으면 엄마는 매니저 역할을 할 수가 없어.

너만의 계획을 세우면, 엄마는 너의 알람시계가 되어 줄게.

공부든 취미든 무엇이든 좋아."


그날 이후로,

아이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에게 묻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감독직을 사퇴하고, 아이와 매니저 계약을 맺었다.

무급에 연중무휴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


아이는 아침마다 바인더를 쓰겠다고 했다.

하루 일정을 체크하고, 오늘의 투두리스트를 빈 시간에 채워 넣었다.

하지만 아이의 계획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허무맹랑했다.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얼마 되지 않은 자투리 시간에도 계획을 넣어 실천율을 뚝뚝 떨어트렸다.

입술이 근질거려 ‘감독’의 자아가 불쑥불쑥 튀어나왔지만,

‘매니저’의 본분으로 돌아와 더 이상의 훈수는 참기로 했다.

대신 약속했던 대로 알람시계가 되어 아이의 계획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지난 계획의 실행 여부를 함께 체크했다.

자신의 실수를 되돌아보며, 아이는 조금씩 수정해 나갔다.

아직도 아이의 계획은 매일 빗나가기 일쑤지만, 자신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는 듯했다.


나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엄마가 정해 준 공부를 할 때는 하기 싫어 온몸을 베베 꼬던 아이가, 이제는 제법 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동생들의 방해와 얕은 집중력덕에 여전히 시계 분침은 한참을 돌아가지만,

그래도 아이의 마음이 한 자락 자라난 것이 느껴진다.

아이의 엉성한 계획표는 진짜 '아이의 하루'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성적이 어떠하든, 나는 아이에게 삶의 주도권을 넘겨준 그날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시키는 대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간 아이보다,

주도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낼 내 아이가 훨씬 더 많은 성장을 이루리라.


마지막 남은 내 희망도 버려야 하는 것인가 잠깐 고민을 해 본다.

그래도 대학은 집에서 다녀주면 좋겠네. 서울권으로..

내려놓았다 말하고 뒤에서 호박씨를 까고 있는 내 꼴이라니.

아, 이 지독한 욕심을 대체 어디까지 내려놓아야 한단 말인가!

내 욕심이 감독의 자아를 소환해 아이의 주도권을 다시 빼앗아 버리기 전에,

그 화살을 내게로 돌려보기로 했다.


이 몸매로 평생 살 작정인가? 다이어트는 맨날 내일부터.

이제 아이 챕터북 읽기가 버거워지기 시작했잖아. 영어공부는 20년째 계획만 하니?

글 쓰는 게 재미있다며? 근데 이것밖에 못쓸 거야?


이런,

아이에게 사과를 해야겠다.


너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이제 엄마의 욕심은 엄마 자신에게로 돌렸으니,


너는,

너의 꿈을 담은 날개를

활짝 펼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