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이해하려는 기록 3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안겨준 일등공신은 에너지였습니다. 과거 미국은 베트남과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난 돈을 찍어냈습니다. 그로 인해 금 1온스당 35달러를 주겠다고 했던 브레턴 우즈 협정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미국과 더불어 달러는 크게 흔들리게 됐습니다.
핸리 키신저를 중심으로 한 미국 정부는 사우디와의 전략적 합의를 통해 달러 기반 석유 거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모든 석유를 달러로만 결제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 덕에 죽어가던 달러가 기사회생했습니다. 당시 OPEC(석유수출구기구)을 만들어서 전체 산유국들의 행동을 하나로 묶어준 일등공신이 바로 사우디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돈독한 관계가 됩니다.
1970년대에 키신저가 사우디의 알사우드 국왕의 마음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바로 세계열강으로부터 사우디를 보호해 준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군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열강들이 인지했고, 그런 공군력을 유지하는 데는 석유가 필수 핵심 자원이었습니다. 사우디는 세계열강들이 탐낼만한 나라였고 그들로부터 보호가 필요했습니다. 아마도 미국이 보호하지 않았다면 사우디를 쟁탈하기 위해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관계에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트럼프 대통령 1기 시절 사우디에 설치했던 패트리엇 미사일을 철수한 것입니다. 트럼프는 장사꾼 출신이라 눈앞에 보이는 수익 구조에만 치중했습니다. 사우디 입장에서 패트리엇 철수는 ‘보호 해지’로 보일 수 있는 아주 치명적인 사건이었고, 사우디 입장에서는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후 바이든 정부에 들어서면서 사우디와 대립하던 예맨의 후티 반군에 대해 테러 리스트 지정을 해제했습니다. 사우디의 적에게 호의를 베푼 것입니다.
미국은 사우디를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지구 온난화 탓에 국제적으로 화석 연료의 장기적 비전이 약해졌고, 무엇보다 미국 본토에서 셰일 가스가 채굴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입장에서 사우디의 전략적 중요성이 과거보다 낮아진 것은 분명합니다.
중국은 이를 놓치지 않고 석유 시장에서 위안화 결제가 허용될 수 있도록 사우디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석유 결제를 기존의 달러에서 위안화로 대체하려는 시도였습니다. 22년 12월 9일 시진핑 주석은 중국-걸프 아랍국가협력위원회 정상회의 기조연설에서 달러에 대한 반역 의사를 확고히 밝혔습니다.
“중국은 걸프협력회의(GCC) 국가로부터 원유와 액화천연가스 수입을 계속 확대할 것이다. 석유 및 가스 개발은 물론이고 청정 저탄소 에너지 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며, 석유 및 가스 무역에서 위안화를 사용할 것이다.”
또한 시진핑은 페르시아만협력회의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국은 GCC국가들의 자체 안보 유지를 계속해서 굳게 지지할 것이며, 걸프 지역을 위한 집단 안보 체제를 구축할 것이다. 중국과 걸프 국가 간 평화적 핵 이용 기술 포럼을 설립하고 핵 안보 시범 센터를 공동으로 건설해서 GCC 국가들의 평화적 핵 이용과 핵기술 분야 인재를 양성할 것이다.”
중국은 사우디를 보호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더해서 핵이라는 선물까지 얹어서 줄 생각을 피력합니다. 핵은 가지고만 있어도 누구의 보호도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에 사우디는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사우디 실세 왕세자이자 총리인 무함마드 빈살만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역사적인 새 시기”라고 평가했습니다.
트럼프로서는 세일 오일 확보로 미국이 추가 대가 없이 사우디를 보호해 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고, 사우디 입장도 중국이 세계 제1의 에너지 수입국이니까, 미국보다는 중국에 붙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중국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미국 주도의 결제 시스템인 ‘SWIFT’를 대체할 수 있는 ‘CIPS’도 완성해 놓았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2025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석유 거래에서 디지털 위안으로 결제한 첫 거래도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달러 종말론을 주장하는 달러 회의론자들은 달러의 시장 점유율이 01년 73%에서 20년 55%로 하락했고, 23년 상반기 러시아 제재가 시작된 뒤로는 47%까지 내려갔다고 주장합니다. 달러의 점유율 하락 속도가 지난 20년 평균치보다 무려 10배나 빨라지면서 유례없이 가파른 속도로 달러 체제로부터의 이탈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세상 모든 기축통화는 계속해서 바뀌어 왔습니다. 언젠가는 달러의 시대도 끝이 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 세대에서 이루어질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01년부터 달러의 무역 거래 점유율이 점차 하락한 것은 맞지만 그동안 유로화도 생겼습니다. 유로화가 생기고 난 후에도 달러는 계속해서 안정적인 흐름을 보여줬습니다. IMF(국제통화기금)가 발표한 22년 4분기 외환 보유액 구성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달러의 시장 점유율은 달러 회의론자들의 분석과 달리 47%가 아닌 58.4%였습니다.
전 세계 결제에서 위안화의 국경 간 사용은 22년 2%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23년 들어 사우디와의 석유 거래에 위안화가 사용되면서 2.3%까지 급증했습니다만 달러를 위협하기에는 매우 빈약한 수준입니다. 세계는 여전히 꼭 필요한 물건을 사야 할 때 달러가 아니면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수치상으로 위안화의 거래를 늘리려는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수준이 위협적인 수준으로 커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위안화는 투명하지 않습니다. 국제 통화로서의 투명성을 담보할 수 없다면 위안화의 신뢰는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위안화를 준비 통화로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은 몹시 곤혹스러운 상황(외환 위기 같은)을 겪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도리어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이 어떠한 방식으로 달러의 기축 통화 패권에 도전할지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