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이해하려는 기록 4
이란과 미국의 관계를 깊이 있게 공부해보지 못한 일반인들은 ‘이란이 불법적인 핵 개발로 이미지가 나빠졌겠지’ 정도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란 외에도 핵을 보유한 나라는 적지 않습니다. 같은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도 핵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들을 ‘악의 축’으로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유만으로 이란이 ‘악의 축’이 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 미국은 이란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며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했습니다. 산유국인 이란의 석유 수출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국제 결제망인 SWIFT 사용조차 제한했죠. 이후 이란은 오랜 기간 중동의 ‘위협적인 국가’로 취급받게 됩니다.
미국과 이란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틀어진 근본적인 이유는 핵이 아니라 석유와 달러였습니다. 미국은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를 보유한 국가입니다.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얻게 된 것은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세계 주요 국가들이 합의한 결과였습니다.
당시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달러 중심 체제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미국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달러 중심 질서를 관철시켰습니다. 동시에 미국은 달러를 사용하는 우방국들을 해군력과 군사력으로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달러를 써주는 대가로 ‘안보’를 제공한 셈이죠.
초기의 달러는 금과 교환이 가능한 실물 화폐였습니다. 달러를 들고 은행에 가면 금으로 바꿀 수 있었죠. 하지만 1971년 닉슨 쇼크 이후 달러는 금과의 연결이 끊기며 명목 화폐가 됩니다. 이때부터 달러의 가치는 ‘약속’에 기반하게 되었고, 미국은 필요할 때마다 달러를 발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갖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보자면 미국은 전 세계를 상대로 신용을 찍어내는 위치에 올라선 것입니다. 돈이 부족해지면 인쇄기를 돌리면 되는 구조였죠.
문제는 어떻게 이 명목 화폐인 달러를 전 세계가 계속 사용하게 만들 것인가였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헨리 키신저입니다. 그는 달러의 운명을 좌우할 전략을 세우는데, 바로 석유를 오직 달러로만 거래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자동차 산업이 급성장하고 항공기가 등장하면서 석탄의 시대는 저물고 석유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전쟁 물자 측면에서도 석유는 핵심 자원이 되었고, 군사력은 곧 공군력으로 평가받던 시기였습니다.
키신저는 주요 산유국들과 협상을 통해 ‘석유는 달러로만 판다’는 독점적 계약을 체결합니다. 중동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직접 목격한 산유국들은 이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계약 이후, 각국은 석유를 구매하기 위해 자국 통화를 달러로 바꿔야 했습니다. 이라크와 이란 역시 팔레비 왕조 시절까지만 해도 이 질서에 순응했습니다. 석유라는 실물 자원을 팔고 달러라는 종이를 받았지만, 미국이 체제를 보호해 주고 그 달러로 전 세계의 상품을 살 수 있었기에 큰 불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중동 국가들의 인식도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란에서는 미국 대사관 점거 사건이 발생했고, 2000년대 들어 이란 대통령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노골적으로 달러 체제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는 “석유는 대부분 중동에서 생산되는데, 왜 석유 시장은 중동에 없는가”라며 이란에 석유 거래 시장을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란산 석유를 달러가 아닌 유로화나 엔화로도 결제하겠다고 밝혔죠. 이는 달러 패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습니다.
미국은 처음에는 외교적으로 이란을 설득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2008년, 이란이 실제로 석유 거래에서 달러 외 통화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강경한 대응으로 돌아섭니다.
이때 등장한 명분이 바로 ‘악의 축’입니다. 이란을 불법 핵 개발로 세계를 위협하는 국가로 규정하며 국제 사회에 제재를 요구한 것이죠. 겉으로는 정의를 위한 조치처럼 보였지만, 본질은 달러와 석유 질서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만약 핵 보유 자체가 문제였다면, 이미 핵무기를 가진 파키스탄이 먼저 제재 대상이 되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미국은 이란산 석유를 가장 많이 수입하던 일본에도 압력을 행사해 거래 중단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이란 경제는 급격히 위축됐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리얄화 가치는 폭락합니다. 한때는 ‘토만’이라는 비공식 화폐가 통용될 정도로 국가 통화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죠.
오늘날 달러가 기축통화로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에는 석유와 중동 산유국들의 협조가 있었습니다. 한때 미국과 긴밀한 관계였던 이란이 달러 체제에 도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악의 축’으로 낙인찍힌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은 달러를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냉정합니다. 달러 패권에 도전한 국가들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를 보면, 이 질서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방식이 앞으로도 계속 통할지는, 이제 시간이 답해줄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