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이해하려는 기록 12
지난 글 '시장을 이해하려는 기록 8: [AI 거품의 최악 시나리오: 시작은 주식이 아니다]'에서 AI 거품이 주식이 아닌 신용 시스템에서 먼저 무너질 수 있다는 구조를 다뤘습니다. BDC가 어떻게 사모신용 시장 전체의 뇌관이 되는지, AI 인프라 기업의 현금흐름이 왜 구조적으로 취약한지, 그리고 그 충격이 어떤 경로로 나스닥까지 전이되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쓰면서 계속 걸리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실이 이미 진행 중이라면, 왜 숫자는 멀쩡해 보이는가?'
이번 글은 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주식은 매 초 시장가격이 형성됩니다.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검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모대출에는 실시간 시장가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운용사가 직접 자산 가치를 평가(Marking)하는 구조입니다.
문제는 이들에게 장부가를 낮출 인센티브가 구조적으로 없다는 점입니다. 장부가 하락은 곧 관리자산(AUM) 감소이고, AUM 감소는 곧 수수료 수익 감소입니다. 운용사 입장에서 자산 가치를 보수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 밥줄을 조이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 결과가 최근 블랙록 사례에서 드러났습니다. 블랙록 TCP캐피탈은 아마존 셀러 기업 인피니트 커머스(Infinite Commerce Holdings)에 집행한 약 2,500만 달러 규모의 대출을 2025년 4분기 결산에서 전액 손실 처리했습니다. 불과 3개월 전 블랙록이 이 자산을 100센트 그대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가치가 소멸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부실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장부상에서만 100이라는 숫자가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발성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블랙록 TCP캐피탈은 같은 시기, 자사 펀드 전체의 순자산가치(NAV)를 19% 일괄 하향 조정한다고 공시했습니다. 수십 개 대출 자산에 걸쳐 쌓여 있던 손실이 동시에 수면 위로 올라온 것입니다.
업계에서는 이런 자산을 '좀비 자산'이라 부릅니다. 실질적으로는 죽었으나 장부상으로는 살아있는 자산들이 지금도 수많은 사모 펀드 포트폴리오 안에 조용히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조가 다음 문제를 낳습니다.
장부가가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보력 있는 투자자들이 먼저 파악합니다. 실제 가치는 70인데 장부가가 98로 유지되고 있다면, 합리적인 투자자의 판단은 하나입니다. 지금 당장 환매해서 98을 챙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판단은 틀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심리가 시장 전체로 퍼지는 순간부터입니다.
환매 요청이 몰리면 운용사는 현금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때 팔 수 있는 자산, 즉 시장성 있는 우량 자산부터 매각하게 됩니다. 부실 자산은 사줄 사람이 없으니 팔지 못합니다. 그 결과 펀드에는 팔기 어려운 부실 자산만 남게 되고, 이를 목격한 다른 투자자들은 더욱 빠르게 환매에 나섭니다.
'이것이 펀드런(Fund Run)입니다.'
이것은 이미 가설이 아닙니다. 2026년 2월, 블루아울(Blue Owl)은 자사의 리테일 전용 프라이빗 크레딧 펀드인 OBDC II의 분기 환매 제도를 전면 폐지했습니다. 환매 요청이 분기 한도(5%)를 초과하자, 블루아울이 선택한 것은 추가 환매를 막는 것이 아니라 환매 제도 자체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투자자들은 이제 원할 때 돈을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기술 특화 펀드 OTIC 상황은 더 심각했습니다. 해당 분기 환매 요청이 순자산가치(NAV)의 15%까지 치솟았습니다. 운용사가 약속할 수 있는 분기 한도의 세 배입니다. 블루아울이 OBDC II를 상장 펀드와 합병시켜 투자자들에게 우회 출구를 제공하려 했던 시도가 무산된 직후였습니다. 합병 조건이 비상장 펀드 투자자들에게 최대 20%의 손실을 안길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자문사 업계가 집단 반발하며 합병을 저지시킨 것입니다. 막다른 곳에 몰린 블루아울이 내린 결론은 환매 자체를 닫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블랙록의 260억 달러 규모 HPS 코퍼레이트 렌딩 펀드(HLEND)에도 동일한 압력이 밀려들었습니다. 분기 환매 요청 규모가 12억 달러, NAV의 9.3%에 달했습니다. 펀드 설정 이래 처음으로 5% 한도가 돌파된 것입니다. 블랙록은 환매를 5%로 제한했습니다. 돈을 돌려달라는 투자자 중 절반이 다음 분기를 기약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블랙스톤 역시 820억 달러 규모 크레딧 펀드에서 기존 5% 한도를 7%로 올리고도 모자라, 자사 자금 4억 달러를 직접 투입해 환매 요청을 겨우 소화했습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들이 자기 돈을 쏟아부어 투자자 출금을 틀어막는 상황, 이것이 지금 프라이빗 크레딧 시장의 실제 모습입니다.
가격이 가짜였기 때문에 역선택이 발생하고, 역선택이 발생하기 때문에 펀드런이 가속됩니다. 이 두 구조는 서로를 강화합니다. 그리고 이 악순환은 지난 글에서 다룬 BDC 연체율 상승, 하이일드 스프레드 확대, 지역은행 대손충당금 증가라는 캐스케이드(cascade)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부실이 표면으로 드러나기 전, 그 내부에서 먼저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이것입니다.
블루아울과 블랙록의 사례는 이미 수면 위로 올라온 것들입니다. 더 큰 문제는 아직 올라오지 않은 것들입니다. 사모 시장의 위기에는 시차(Lag)가 있습니다. 부실이 발생해도 운용사가 장부가를 조정하지 않는 한, 공식 손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시차가 지금 사모 시장을 표면상 안정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핵심 요인입니다.
공개 시장은 AI 랠리로 호황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나스닥은 견고하고, AI 대표 종목들은 강세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이미 역선택이 시작됐고, 우량 자산의 매각이 진행되고 있으며, 펀드 내부에는 부실 자산의 비중이 조용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금리를 내리면 부동산 가격이 회복될 여지가 있었습니다. 담보 자산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가격이 과도하게 부풀어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핵심은 다릅니다. AI 디스럽션으로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소멸한 기업의 대출은, 금리를 아무리 내려도 회수할 방법이 없습니다. 담보로 잡은 코드와 구독자 기반이 쓸모없어지는 순간, 그 대출은 영구적으로 손실로 확정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장부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위기가 공식화되는 시점은 장부가 현실화(Mark-to-Market)가 강제로 집행될 때입니다. 그 순간 연기금과 국부펀드 등 거대 LP들의 자산 가치가 일제히 조정되고, 충격은 금융 시스템 전반으로 전이됩니다.
그렇다면 이 균열을 먼저 인식한 자금들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블루아울(Blue Owl)을 비롯한 상장 사모펀드 운용사들의 주가는 고점 대비 상당폭 하락했습니다. 그러나 장부가에 대한 불신은 주가 하락보다 더 냉혹한 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가가 이미 많이 빠진 상황에서도 이들 종목의 공매도 잔고 비율은 15~18%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S&P500 편입 종목의 평균이 2~3% 수준임을 감안하면, 6~9배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통상 주가가 충분히 하락하면 공매도 세력은 차익 실현을 위해 포지션을 청산합니다. 그런데 청산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스마트 머니가 현 주가조차 아직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하나입니다. 장부가 현실화가 공식적으로 집행되는 그 순간입니다.'
물론 지금의 균열이 2008년과 같은 시스템 전체의 붕괴로 이어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모대출은 파생상품이 복잡하게 얽힌 서브프라임 구조와 달리, 대출자와 차입자 간의 직접적인 관계가 강합니다. 대출의 잔존 만기가 통상 2년 내외인 만큼, 수십억 달러 규모의 기업들이 동시에 소멸할 확률은 낮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위기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시스템이 붕괴하지 않더라도, 장부에 숨겨진 손실이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투자자들이 입을 실제 손실은 예상보다 훨씬 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조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사모대출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운용사는 손실을 인정하지 않고,
정보력 있는 투자자는 먼저 빠져나가며,
펀드에는 부실 자산만 쌓여갑니다.
그러나 장부에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숫자가 실제 가치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시장 급락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블랙스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구조를 보면, 그 전개 경로는 이미 상당 부분 진행 중입니다.
AI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AI 투자의 속도와 레버리지는 명백히 과했습니다.
크레딧 사이클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진짜 위기는 이 침묵이 끝나는 날,
숫자가 현실을 따라잡는 그 시점부터 시작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