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크리스마스 앞에 떠오른 단상
"낭만 없는 새끼"
말 끝나기 무섭게 친구 녀석이 쏘아붙인다.
"왜? 난 진심인데!"
예상했던 반응에 웃음 지으면서도 내 시선은 여전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친구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정문 문주, 그곳에는 반짝이는 조명과 초록과 붉은색으로 물든 리스들이 소란스러운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다.
"메리크리스마스!"라고
그 인사를 받으며 나는 친구가 질색하는 그 말을 또 뱉어냈다.
"이게 무슨 돈지랄이야."
좋아 죽여버릴 것 같은 친구집 정문이라 부러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다. 집 앞 가게 안에 켜진 트리를 보면서도, 밤산책을 나서면 만나는 산타 조명을 보면서도, 그리고 복도에 전시된 아이들의 방과 후 작품을 보면서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들었는데도 잊지 말라는 듯 계속되는 성탄 인사를 보면서 늘 되뇌는 말은 "이게 뭔 짓이지?"이다.
무탈한 한 해가 지났음에 감사하며 지나가면 될 일이지 왜 유난 떠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요즘 들어 더 그러지 못하는 것은 친구 말마따나 낭만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낭만이 영영 사라질까 걱정되는 마음이 더 앞서서 일지도 모른다.
'올해도 이 크리스마스라는 이벤트를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쓰레기들이 만들어질까?'
각종 만들기 재료와 꾸미기 재료들이 소비된다. 25일이 지나면 귀퉁이로 밀리거나 쓰레기통에 처박힐 것이 당연한데, 괜한 선물을 준비하고 케이크에 불을 붙인다. 가족의 생일이거나 특별히 축하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소비하고.
붓고.
써댄다.
남들이 하니까 아무 거리낌 없이
가장 걱정되는 것은 이런 소비를 당연시하는 아이들이다. 선물은 당연하고, 먹을 것도, 반짝이는 장식도 당연하다. 그리고 그날 하루만 입고 다른 날에는 꺼낼 일 없는 의상도 오케이다. 그저 크리스마스라서! 하지만 그 끝을 모르는 소비의 향연은 분명 우리에게 청구서를 내밀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서 크리스마스의 따듯함과 축하의 의미를 폄훼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가 그 당시 율법학자들이 내세우던 전통에 순응하지 않고 진정한 신의 뜻을 전하려다 박해받았다는 사실 쯤은 알고 있다.
즉 예수는 남들이 그러하다고 해서 관성처럼 따르는 이가 아니었다. 수많은 탄압 속에서도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관과 진리를 담대하게 펼쳤고, 그랬기에 지금까지 그의 정신을 높게 기려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날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은, 글쎄다. 혹시 떠밀리듯 크리스마스트리를 주문하고 내키지도 않는 선물을 고르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나도 올해만큼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해보지 않으려 한다. 트리도 필요 없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어떤 박해(?)를 당할지 벌써 가슴이 설렌다.
다만 아이들에게 꼭 그 말은 해줘야지
특별하지 않아도 좋으니 아무 일 없이 하루하루 함께하는 평범한 날들이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라고
그러니
십자가에는 매달지 말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