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다른 13년차 (교사)부부의 세계
“나 얼마 보내야 해?”
“부인, 내가 매달 이야기 해줬는데 지금 5월이야. 열 번 넘게 이야기했다고!”
결혼 13년 차, 이제 그러려니 할 만도 하지만, 매월 17일 즉 우리의 월급날에 돌림 노래처럼 반복되는 이 대화에서 ‘아내와 내가 참 나랑 다른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나는 계획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어딘가 훌쩍 떠나는 여행을 위해 ‘훌쩍 떠나는 여행 계획’을 세운다. 요일별로 식단을 짜고 장 봐온 식재료를 냉장고에 차곡차곡 채워둔 뒤 끼니마다 계획한 메뉴를 차려 먹는다. 식단을 계획대로 차려낸 후 해당 요일에 X 표시를 하는 것은 묘한 쾌감을 주는 일이다. 언젠가 나의 묘비에 적을 글귀를 정하라고 해서 별 망설임 없이 [다 계획대로다]라는 말을 적었던 기억도 난다.
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매년 12월이 되면 다음 연도 적립 금액과 이를 위한 월별 필요 금액을 계산한 뒤 아내를 부른다. 억지로 끌려온 그녀에게 목표금액과 월별 이체해야 할 금액을 알려주고 이 계획의 당위성에 대해 강변한다. 물론 목표금액에 대한 이의 제기 기간을 1주일 정도 주는 스윗함도 잊지 않는다. 그 일주일이 지나면 무르는 경우는 없다. 무조건 실행이다.
그런 나와 결혼한 아내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계획이 계획인 사람’이다. 훌쩍 떠나는 여행의 본질을 알고 운전석에서 자유분방한 핸들링을 보여줄 수 있으며, 식사 메뉴는 요리 전 냉장고에 있는 무엇인가로 대충 해결하면 끝인 여인이다. 만약 묘비에 무엇을 적을지 물어본다면 그런 걸 왜 벌써 정하냐면서 팔랑팔랑 날아가겠지.
성향이 이리도 다르다 보니 집안 크고 작은 의사결정은 물론이고 아내가 학급이나 학교의 주요 행사 계획을 세울 상황이 되면 그녀는 숱한 핀잔을 감수하면서까지 기어코 나에게 나름의 계획을 들고 온다. 그러고는 애교 넘치게 “신랑”, 아니면 “오빠” 소리를 연발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학교마다 학습 발표회 준비가 시작되던 그해 9월도 그러했다. 골똘히 무엇인가를 생각하느라 저녁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곧 뭔가 물어볼 게 있음이 분명했다.
“무슨 일 있어?”
잠시 뜸을 들이던 아내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학습 발표회 무대 말이야. 부채춤을 해보려고 하는데 신랑 생각은 어때?”
“부채춤?, 그럼, 동원(가명)이는?”
“같이 해야지.”
“처음부터 끝까지?”
“응”
단언컨대 무모한 계획이었다. 부채춤 자체가 지도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아내 반에는 자폐 학생이 한 명 있다.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긴 하지만 자폐 학생의 특성상 선택적 주의집중이나 운동협응능력이 또래들에 비해 많이 지체된 학생이다. 가끔 일으키는 분노 발작 때문에 어려움을 토로하던 그녀가 왜 이런 무모한 계획을 세웠는지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
“좀 쉽게 가보는 건 어때? 이런 방법도 있어….”
예전에 지도했던 자폐 학생의 사례를 들어가며 아내에게 이런저런 대안을 얘기해줬다. 이를테면 공연 음악 간주 중에 등장해 폭죽을 터뜨리거나 마술 도구를 활용해 깜짝 이벤트를 보여주고 2절이 시작하기 전 퇴장하는 식의 출연이다. 이 방식은 혹시 장애 학생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출연이 어려워지더라도 전체 무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나름 17년 차 특수교사 남편의 경험치가 담긴 조언이 나쁘지는 않았는지 와이프는 한참이나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공감을 표시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마 와이프는 이미 고갯짓으로 부채춤 리듬을 타며 무모함이라는 계획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고 있었나 보다. 기어코 와이프는 부채를 펼치고야 말았고 매일 저녁 푸념과 한숨이 섞인 하소연이 이어졌다.
“동원이가 부채만 꺼내면 울어, 어떻게 해 신랑?”
“내가 어렵다고 했잖아. 차라리 지금이라도 바꾸는 건 어때?”
“근데 이미 부채를 다 사버렸어.”
“흠….”
동원이와 관련해 아내에게 도움이 되는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었지만 생각나는 말들을 함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사실 아이의 모습도, 관찰되는 행동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은 특수교사가 아니라 점쟁이가 하는 일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상황과 맥락을 알지 못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원론적인 자폐 학생 지도 방안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며 아내를 다독여 주는 일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무모한 줄 알면서도 계획을 바꾸지 않았던 아내가 어쩔 수 없이 겪을 시련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후에도 아내는 마치 성에 차지 않는 수련생을 지도하는 부채춤 명인이라도 된 듯 모든 기운을 쏟아내고 진이 빠진 채 수심 가득한 모습으로 퇴근하는 일상을 계속했다. 어느덧 공연 사전 연습 일이 있던 날 와이프는 지금까지의 어느 날보다 어두운 표정으로 퇴근했다.
“어땠어?”
“큰일 났어, 줄도 엉키고 안무도 안 맞고”
“동원이는?”
“뻔하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소파에 널브러진 아내를 보며 그때 더 적극적으로 말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제 본 공연까지 남은 날은 고작 사흘, 이미 펼쳐진 부채를 접기에는 늦어버렸다. 간신히 샤워를 마치며 생각을 정리했는지 욕실을 나서는 아내의 눈에서는 다시 결연함 아니 그 이상의 비장함이 엿보였다. 이 비장함의 기운이라면 아마 그녀의 반 아이들은 학습 발표회 날 전까지 쉬지 않고 부채핸섭을 멈출 수 없겠지.
낙심의 퇴근과 비장함의 출근은 그 후로도 3일간 이어졌고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아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딸과 아들 녀석도 다니고 있기에 녀석들의 무대도 볼 겸 학교로 향했다. 반짝이는 율동 복을 입고 뽀로로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대는 유치원생부터, 아이돌로 빙의한 듯 화려한 춤사위를 뽐내는 고학년까지 갖가지 음악과 공연의 향연이 지나간 뒤 드디어 사회자가 곧 펼쳐질 부채춤 무대를 예고했다.
‘후’
무대를 준비한 것은 아내인데 괜히 내가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쓸어댔다. 무대막이 오르자, 분홍과 파란색 안무 복을 입은 아이들이 끝이 솜털처럼 하얀 부채를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객석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고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본격적인 공연 시작 전이지만 아이들의 부채는 보일 듯 말 듯 살랑거렸고 그 일렁거림이 와 닿았는지 내 심장도 덩달아 울렁울렁거렸다. 드디어 공연 곡(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이 흘러나왔다.
서툴게 종종거리는 발놀림
옆 친구와의 간격을 살피느라 바쁜 눈빛
가끔 끊어졌다가 친구의 고갯짓에 후다닥 붙는 대열
회전 타이밍을 놓쳐서 반 박자 늦게 돌다 보니 친구 부채와 부딪치는 모습까지
여유롭게 무대를 즐길 정도는 아니지만,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어우러지고 흐트러지며 물결치다 빙글 돌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최선을 다해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는 아이들만 있을 뿐이었고 그 안에는 잘하는 친구도 못하는 친구도, 장애인 친구 비장애인 친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예쁜 아이들만 있었다. 그리고 객석 한가운데에서 혹시라도 안무를 까먹은 아이들이 있을까 봐 두 손을 부채 삼아 쉼 없이 흔들어 대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했다.
마침내 부채춤의 하이라이트인 꽃 만들기에 이르자 꽃봉오리 한가운데에서 아이가 빙글빙글 돌더니 음악에 맞춰 부채를 살랑거렸고 잔잔하게 마무리되는 음악에 맞춰 부채춤 공연도 막을 내렸다. 강당 안은 박수와 함성으로 가득했고 나도 등 뒤의 찌릿함을 느끼며 마지막 아이가 무대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쉬지 않고 박수를 건넸다. 그해 아이들과 아내가 함께한 부채춤은 그렇게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날 저녁, 무대에서 춤을 추느라 피곤했는지 딸 아들은 일찍 잠이 들었고 조촐한 안주와 함께 나와 아내만 식탁에 앉았다.
“얘들 진짜 잘하더라. 뭐 3일 동안 몽둥이라도 잡은 거야?”
“또 그 소리네, 나 잘렸으면 좋겠어?”
“장난이지! 어쨌든 공연 끝났는데 이제 홀가분해?”
“그렇게는 한데, 애들한테 좀 미안하기도 해”
“뭐가 미안한데?”
한참을 생각하던 와이프는 공연 준비 과정에서 동원이가 실수할 때마다 옆에 서 있던 친구들도 함께 나무랐던 이야기를 꺼냈다. 녀석들도 부채춤이 처음일 텐데 옆에 장애 학생까지 신경 써야 하니 얼마나 어려웠겠냐며 공연이 무사히 끝난 것은 그 아이들 도움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 그 녀석들도 동원이 덕분에 조금 다른 친구와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우는 값진 시간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우리”
급조된 말이지만 약간은 위로가 되었는지 아내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담에도 부채춤 할 거야?”
태생이 계획형인 인간인지라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와이프는 일고의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듯 곧바로 대답하며 잔을 비워 버린다.
“그런 걸 뭐 하러 지금부터 계획해?”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녀는 역시 무계획이 곧 계획인 사람이다. 하지만 계획이 없다고 해서 공허한 것은 아니다. 잔이 비워지면 또다시 새로운 술이 채워지듯, 그녀의 무계획이라는 잔 속에도 반짝이는 가능성이 다시금 가득 채워질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계획한다.
그녀가 마음껏 길을 잃을 수 있도록, 눈에 띄지 않게 표지판을 세워두고,
그녀가 훌쩍 떠났다가도 돌아올 수 있도록 길 끝엔 밝고 따뜻한 집을 준비해 둔다.
그러기 위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일정에 맞춰 가스비와 전기요금을 미리 내두는 것. 그녀의 자유분방함이 늘 따뜻하게 켜져 있을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