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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Dec 10. 2023

카뮈를 생각하며

장례식은 정말 죽은 자를 위한 것일까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이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담은 글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누군가를 비난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했던 카뮈가 왜 첫 문장으로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를 골랐는지 그저 분석해 보고 싶었다. 왜 그토록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무덤덤해야 했는지, 왜인지 나와 닮아 보이는 뫼르소를 마저 이해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글은 독자에게 뫼르소를 이해시키는 데 목적이 있으며, 부러 뫼르소와 대부분 사람의 차이점에 강점을 두어 글을 썼음을 밝힌다. 사실 죽음은 거의 언제나 금기시되는 주제라서, 사람들에게 죽음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싶기도 했다.


  카뮈는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이다. 그는 가난했다. 그의 어머니는 스페인인으로 청각장애를 가진 문맹이었다. 카뮈는 그녀를 사랑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많이.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 유명한 첫 문장에서 드러나듯 이방인의 배타적인 서술자,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이 짧은 문장으로 우리는 멋대로 뫼르소를 무정한 아들로 상상한다. 독자에게 뫼르소를 한 번에 각인시킨 이 문장은 2부에서 뫼르소의 말을 통해 의미가 완전히 뒤집힌다.



누구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할 권리가 없다.

그건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억지로 감춘 것이 아니다. 어머니가 좋지 않은 곳에 갔을 리가 없다는 현실 도피적인 믿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 문장은 타인의 죽음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태도에 관해 얘기한다.


  만약 절친한 친구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간다면, 우리는 무작정 가지 말라고 말리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이 고민해 봤냐고 물어보고, "그래 네가 그렇다면 너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잘 가"라며 친구의 의지를 존중하고 지지해 줄 것이다. 무작정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 것은, 그저 친구가 항상 자신의 곁에 남아있길 바라는, 친구의 사정이나 의지를 존중하지 않는 단순한 본인의 이기심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우리는 죽음이라는 여정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무작정 안타깝다며 슬퍼한다. 하지만 죽음은 정말 두려운 것일까? 우리는 죽음에 대해 무지한 만큼 죽음을 크게 느끼고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 죽은 자에 대한 존중이 조금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해 열릴까? 사실 죽음은 그녀의 끝을 의미할 뿐, 그녀의 생애 중 어떤 것도 바꾸지 않는다. 죽음은 그 스스로는 어떤 관계도 끝맺지 않았다. 정지된 채로 지속될 뿐이다. 그러니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죽은 자에 관한 모든 사회적 변화는 살아있는 사람들 중심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장례식조차 산 자들이 죽은 자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일어난다. 그곳에서 산 자가 죽은 자에게 하는 말은 일방향적이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의 후회를 털어놓는 것이다. 분노가 목표지향적이고 행동을 위한 감정이라면, 슬픔은 수용을 위한 감정이다. 그래서 그들은 장례식장에서 슬퍼하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일방적인 단절의 의미를 담은 눈물이 정말 죽은 자를 위한 눈물일까.


어머니가 자신을 떠났다. 그 이유만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그건 남겨진 자신을 위한 눈물일 것이다. 어머니가 본인 의지로 나를 떠난 것인지. 아프지는 않았는지. 외롭진 않은지. 떠나간 그녀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멋대로 슬퍼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죽음을 무조건 부정적이라 낙인찍을까. 죽음은 긴 시간 동안 금기시 되어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직 죽음의 사회적인 측면에 관해 깊게 논의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긴 시간 동안 '남겨진 자신을 위한 슬픔'을 '죽은 어머니를 위한 눈물'이라고 착각해 왔다.




  카뮈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신파적인 대사나, 달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리는, 구역질 나는 눈물 짜내기 적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카뮈의 사랑은 그녀에 대한 존중으로 드러난다. 뫼르소가 아닌 뫼르소의 어머니 입장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카뮈가 죽음을 그녀의 것으로 여겼기에 뫼르소는 장례식장에서 멋대로 일방적인 말들을 쏟아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되지 않았다. 그 대신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졸려 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된다. 자신과 무관한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것처럼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상 중 어느 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런 뫼르소를 이해하지 못해서, 사람들은 그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뫼르소는 어머니가 관속에 누워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었기에 이곳에 없다. 그것은 뫼르소가 영혼이나 사후세계를 믿는다는 의미가 되지 않는다. 그저 뫼르소에게 죽음은 그저 그녀가 이 세상과 독립적으로 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었다고 그녀가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육체와 무관하게 환*은 남아있다. 그렇기에 뫼르소는 죽은 어머니를 여전히 존중한다. 죽은 자와의 관계를, 자기 위주로 보지 않고 여전히 상호적이지만, 이제는 단절된 관계로 여긴다. 죽음은 죽은 사람의 성격, 말과, 웃음 중 어떤 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저 그 모든 것들을 살아있는 자들로부터 독립시켰을 뿐이다.



누구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할 권리가 없다


  뫼르소에 의하면, 남겨진 자들은 슬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슬퍼할 권리가 없다. 죽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에, 타인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몫은 오직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앞으로의 삶에서 그들을 배척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보았다.


  




* 이제부터 나는 죽은 자가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상호작용하지 않더라도, 살아있을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관찰했던 그녀의 의지, 생각들, 가치관과 우리에게 남은 그녀와의 기억같이 육체와 무관하게 여전히 세상에 남아서 우리와 여전히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들을 묶어 "환"이라고 하겠다.


예전부터 나만의 용어를 만드는 것이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였으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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