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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Feb 07. 2024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는 죄인일까

   예술은 아름다움의 측면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상상된 것인데, 왜 비극이 존재할까. 왜 우리는 계속해서 비극을 소비해서, 예술가가 비극을 계속 만들어내게 하는 걸까. 누구나 꽉 닫힌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악당을 물리치고, 선량한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행복해지는 이야기들은 읽고 난 후에도 찝찝하지 않고 그저 즐거워진다. 그러나 그 밝고, 행복한, 동화 같은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그리스인들부터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에서 도저히 끝나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희극이 아닌 비극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만약에 오이디푸스가 끝까지 파헤치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기 파멸에 이르지 않았을 텐데”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버리지 않았다면, 운명이 실현되지 않았을 텐데” 아마도 오이디푸스 왕을 읽은 모두가 해봤을 가정이다. 이렇듯 우리는 비극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계속해서 의문과 가정을 던진다. 오이디푸스 왕은 주어진 현실이 아닌 비극으로 상상된 예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멈추지 못하고 다시금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며, 비극에 생명을 부여한다.
   비극은 봄의 제전에서 유래한 것이다. 봄의 제전은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다. 왜 비극경연대회는 구태여 디오니소스 축제 때 열렸을까. 프리드리히 니체는 아폴론과 대척되는 존재로 디오니소스에 주목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 이성의 신인 아폴론이었다면, 현대에 이르러서 가장 중요한 신은 디오니소스다. 태양의 신인 아폴론은 이성, 합리, 지식, 예언, 의술, 음악 등을 담당한, 인간들의 문명의 신이다. 아폴론이 담당하는 이성, 합리, 의술, 음악 등은 명백하고, 코스모스적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광기와 술의 신이다. 광기와 술은 분명하지 않으며, 카오스적이다. 게다가 디오니소스는 반인반신으로 태어나 신이 되었으며,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둘 다 가진 미소년으로 그려진다. 신과 인간, 남성과 여성이라는 기존의 코스모스적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 그게 디오니소스다. 헤겔의 변증법적으로 사고해 보았을 때, 아폴론은 테제가, 디오니소스는 안티테제가 된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전쟁, 복수, 사랑 같은 감정과 광기의 영역 또한 인간의 일부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사랑, 분노, 복수와 전쟁 그 모든 것이 비극이다. 그래서 나는 비극을 만들고, 소비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욕구는, 기쁨, 아름다움, 질서적인 것들의 측면만이 아니라 슬픔, 혼란, 추함의 측면으로 삶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안티테제의 작용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운명과 인간’이라는 반근대적 주제를 가진 “오이디푸스 왕”이 운명을 믿지 않는 현대에서도 여전히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오이디푸스의 주체성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많은 사람들이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찌르는 장면에서, 그가 운명에게 패배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말을 인용하자면, 인간 중 가장 위대하다는 오이디푸스는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친을 살해하고, 자신의 어머니와 동침한다’ 운명은 단지 그것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저 객관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운명은 행위들 사이에 있을 오이디푸스의 주관적인 감정에 대해서는 정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운명은 오이디푸스가 인생에서 어떤 것을 할지 미리 정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몇 가지 일들이 오이디푸스가 누구인지 결정하지는 못한다. <오이디푸스 왕> 속의 오이디푸스는 본질적으로 성급하며, 테베를 12년간 통치하며 왕으로써 책임감도 있고, 스핑크스를 해결한 영웅으로써 자신감이 있어 신에게도 도전적이다. 이게 조금은 운명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운명이 완전히 결정한 부분은 아니다. 왜냐하면 잔혹한 운명을 받은 오이디푸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버지를 살해하고자 하고, 어머니와 동침하고자 하는 미치광이로 크지는 않았으니까. 오이디푸스는 미치광이로 크지 않았다. 오히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끔찍한 운명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니 운명은 오이디푸스를 파멸시킬지언정 패배시키지 못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동침했다. 이건 그가 저지른 행위의 죄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고 죽인 것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고 동침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운명에 관한 신탁을 듣고 운명을 피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오이디푸스는 죄를 짓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오이디푸스를 죄인이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 또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죄의 관점을 나누어 보아야겠다. 그리스인들은 신을 믿었고, 운명을 믿었다. 운명에는 저지를 죄 또한 속해 있다.


1) 운명에 예속된 죄 역시, 인간에게 주어진 죄이다.

  오이디푸스, 그리고 그리스인들 대부분이 이 사고방식을 채택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거대한 수레바퀴 위에서 굴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살면서 저지른 죄는 수레바퀴의 탓이 아닌 인간의 탓이 된다. 왜냐하면, 운명이 인간의 마음까지는 예속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 왕은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끔찍한 운명을 받았지만, 아버지를 살해하고자 하고 어머니와 동침하고자 하는 미치광이로 크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이디푸스는 계속해서 운명을 거부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그리스인들에게 운명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운명을 거부하는 인간의 의지도 있었다.


2) 운명에 예속된 죄는 주체성이 없으니 죄가 아니다.

  결정론적 운명관이라고도 한다. 모든 것이 운명 속에 정해져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염세주의자 중 누군가가 자살을 했다고 해도, 그의 자살마저 운명 속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현대의 법은 운명을 부정하지만, 주체성에 관련한 부분에서 2)와 결을 같이 한다. 범죄의 3요소 중 하나는 고의성이기 때문이다. 2)의 관점은 운명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죄는 전부 운명에게 돌린다. 조금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다. ‘장발장이 빵을 훔친 건 그의 운명이니 그는 무죄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왜 그리스에서 2)가 채택될 수 없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1)의 사고방식을 택했다. 즉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이 살면서 저지른 모든 죄가 그들의 것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죄를 짓는다. 친구에게 더 필요한 것을 양보하지 않은 죄, 거짓말한 죄 등등 수많은 죄를 짓고 산다. 그러나 이게 죄가 되는 까닭은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양보할 수도, 진실을 말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로 그렇지 않았기에 죄가 된다. 즉, 1)의 중요함은 인간의 선택에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분명히 알고도 보다 미덕적이지 않은 것을 선택할 때 그것이 죄가 된다. 그러나 2)는 운명이 모든 걸 정해놓았으니 애초부터 선택지가 없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결국 1), 2)를 나누는 것은 인간이 생각했을 때 다른 선택지의 유무이다. 선택이 인간에게 주체성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주체성을 가질 수 없다. 오이디푸스 왕의 진정한 논의점은 이제야 드러난다. 극 중에서 오이디푸스는 계속해서 사건을 파헤칠 것인지, 아니면 묻어놓을 것이지 선택할 수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왕으로써 ‘사건을 계속 조사한다’는 더 미덕적인 선택을 했다. 그럼에도 결과는 오이디푸스에게 더더욱 가혹하다. 신과 다르게 인간은 전지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는 나름대로 미래를 가늠해서, 선택의 순간에 최선을 골랐지만, 결과가 최악이다. 이렇듯 오이디푸스는 선택지 중 ‘끔찍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더 미덕적인 선택을 했는데, 그것이 가장 추악한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도덕적 문제 상황에서 정의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이디푸스의 의도는 선했지만 결과가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동기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오이디푸스를 무고하다고 여길 것이며, 결과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오이디푸스를 어쨌든 죄인이라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도덕적 문제 상황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죄인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운명이라는 망치에 얻어맞은 무고한 인간으로 여길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다시 말해, 1), 2)중 1)을 선택한 것은 오이디푸스다. 오이디푸스는 가혹한 운명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길 '선택'했다. 이렇게 오이디푸스는 운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주체성을 가진 존재임을 보인다.



운명을 수용하는 오이디푸스 왕이 여전히 주체성을 가질까?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모든 운명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작중에서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지금은 눈이 있으되, 그때는 눈이 멀 것이요."라는 말을 한다. 물론 오이디푸스가 이 예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의 대리인인 테이레시아스나, 새에 의해서 오이디푸스가 눈을 잃은 것이 아니다.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이디푸스는 눈을 잃는 운명을 스스로 실현한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눈을 찔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감정은 운명에 예속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가 눈을 잃는 것마저 그의 운명이었지만, 그 운명을 기꺼이 따른 것은 그의 '선택'이다. 오이디푸스가 스스로의 의지로 운명을 수용한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운명이 두려워 떠난 오이디푸스는 오히려 그렇기에 운명을 실현시켰다. 또한 그 모든 진실을 깨달은 오이디푸스는 자괴감에 스스로 눈을 찔렀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패배하지 않았고, 여전히 주체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가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길 '선택'했으며, 다른 누구에 의해서도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눈을 잃길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의해 파멸했지만 여전히 주체적이다.




그러니 운명으로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해도 우리는 운명을 거부할 것인지, 따를 것인지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종착역으로 가는 철로 위의 열차인 우리의 삶이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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