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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Dec 21. 2023

항덕과 함께 타는 A380(×1)

Y는 '밤'에 날아가는 비행기의 기종을 맞출 수 있다

  필자는 지금 공항에서 이 글을 적고 있다. 보통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쓰는 글이라면 여행에 대한 설렘이나 걱정을 적을 텐데, 흠.. 하지만 나는 역시 할 말이 없다. 그냥 비행기를 타는구나 싶다. 내가 타는 비행기는 A380으로 2층짜리 비행기라고 했다. 항공사는 아랍 에미레이트인데, 여길 고른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냥 기내식이 맛있다고 해서 골랐다. (기내식 후기는 다음 글에)


  Y랑 나는 12월 21일 밤 11시 50분에 두바이행 비행기를 탄다. 우리는 10시간 가까이 날아가서, 두바이 공항에서 3시간 정도 경유한 후 다시 7시간 30분을 날아가면 프랑스 샤골 드골 공항에 도착한다. 이동시간이 거의 20시간이므로 하루가 지나있을 것 같지만, 파리는 서울보다 8시간 느리다. 그래서 파리 시간으로는 12시간 지난 12월 22일 낮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느려터진 입국심사로 인해 오후 4시쯤에나마 숙소에 도착하면 다행일 거라 생각 중이다. 현재 파리가 빈대 때문에 난리라서,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직행해 침대랑 방에 빈대 퇴치제를 뿌리기로 했다. 우리는 다음날에 스트라스부르로 곧장 가야 하지만 첫날밤인 파리를 그냥 보내기는 아쉬워서 파리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기로 했다. 아주 거대한 트리가 있는 라파예트 백화점과 샹젤리제 거리라니 정말 하나도 안 설렌다.

  아니 솔직히 안 설렌다. 누군가가 나에게 파리를 명품과 패션의 도시라 부른다면 미안하지만 안 설렌다. Y에게 미안하지만 나에게 첫날의 파리는 정말 볼 게 없다. 그나마 재미있어 보이는 게 파리의 크리스마스 마켓인데 엄청 설레지는 않다. 왜냐면 다음날에 크리스마스의 수도라 불리는 스트라스부르를 가니까.

  하지만 나에게 파리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때 설렘을 준다. 노트르담의 꼽추, 레미제라블의 작가인 빅토르 위고의 생가, 사르트르, 미셸 푸코가 다닌 소르본 대학, 라라랜드에 나온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는 재즈바가 있는 도시, 파리! 100년 된 중고책시장,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온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등 잃어버린 세대가 사랑했던 노천카페가 있는 파리. 특히 헤밍웨이는 자신의 파리 여행기를 "움직이는 축제"라 제목 지을 정도로 파리를 애정했다. 나는 이런 파리를 간다. 명품의 도시가 아닌, 문학이 살아숨쉬던 예술가들의 도시인 파리를.




  오늘은 간단하게 이번 여행의 동행자인 Y에 대해 소개해볼까 한다. Y랑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는데, 그때의 Y는 굉장히 조용하고, 남을 배려하는 성격을 가진 친구였다. 그때는 이렇게 은근한 광기를 가진 친구인지 몰랐다. 

Y에 대한 몇 가지 문장을 적어보겠다. 이 중 한 문장은 가짜다.


1. Y는 날아가는 비행기의 기종을 맞출 수 있다.


2. Y는 생일이 2개다.


3. 고등학교 때 Y의 지갑은 복주머니였다.


4. Y는 사진을 찍을 때 표정이 풍부해서 웃긴 사진이 많다.



1. Y는 날아가는 비행기의 기종을 맞출 수 있다. (진실)

  난 살면서 Y보다 비행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Y에게는 거짓말 같은 재주가 있는데, 멀리서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비행기 기종을 맞출 수 있다. Y가 비행기 기종을 구분하는 방법은 2가지로, 밤과 낮에 다른 방법을 쓴다. 낮에는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색깔을 통해 항공사를 추측한다. Y는 항공사마다 가진 기종을 전부 알고 있기에, 비행기의 전체적인 특징을 통해 정확한 기종을 추측한다. 밤에는 항공사 색깔이 안 보이니 기종을 맞추지 못할 것 같지만, 빛의 개수와 동시에 빛이 반짝거리는지, 아니면 시차를 두는지에 따라 기종을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2. Y는 생일이 2개다. (진실)

  Y의 고등학교 때 별명은 인생 2회차다. 별명에 걸맞게 Y는 굉장히 분한 성격이다. Y는 2002년 12월에 태어났는데, 생일은 2003년 1월로 되어있다. Y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나이를 먹는 것이 싫어서 부모님이 다음 해에 출생신고를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K장녀인 Y는 잘 적응했고 늦은 2002년생이지만 빠른 2003년생 취급을 받으며 초등학교를 7살에 들어왔다. 어쨌거나 Y는 진짜로 태어난 날과, 나라에 등록한 생일이 다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정답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3. 고등학교 때 Y의 지갑은 복주머니였다. (진실)

  아까 말했듯이 Y의 고등학교 때 별명은 인생 2회차였다. Y의 '인생 2회차'라는 별명은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만들어졌다. Y의 생일이 2번이라는 점 외에도, Y의 지갑이 한복으로 된 복주머니라는 점과, 고1 때 Y가 그린 자화상을 보고 미술선생님이 "이 중전 그린 얘 누구야?"라고 한 것, Y의 사진을 보면 언제나 티벳 여우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4. Y는 사진을 찍을 때 표정이 풍부해서 웃긴 사진이 많다. (거짓)

  2에서 말했듯이 Y는 차분한 성격이다. 사진을 찍을 때 Y의 표정은 항상 똑같다. 티벳 여우 같은, 어딘가 해탈한 표정이다. 사진을 보면, Y는 인생무상이라는 삶의 진리를 터득한 사람 같다. 중학교 사진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그녀 안의 티벳 여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Y가 이번 여행에서 좀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길 바란다.




  일단 여기까지 적고, 나머지는 비행기에서 겪은 일들을 글로 기록하고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글을 발행해야겠다. 사실 조금 지쳤는데, 옆에서 비행기를 보며 저게 무슨 기종인지 계속해서 얘기하며, 그 중간과정까지 얘기하는 친구랑 3시간째 있다 보면 누구라도 이렇게 될 것이다. 보통 Y가 나한테 기 빨리는 편인데, 오늘은 내가 역지사지를 당하는 중이다. 그간 나에게 영화와 문학으로 비슷한 일을 당해온 Y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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