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머리가 너무 거슬린다.
진짜로, 지금 당장이라도 머리를 밀어버리고 싶다.
어깨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괜히 신경 쓰이고, 살짝만 움직여도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붙는 느낌이 싫다. 날은 또 왜 이렇게 더운지, 괜히 머리카락 때문에 더 덥고, 더 답답하고, 더 짜증 나는 것 같다. 거울을 볼 때마다, 머리칼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게 아니라 나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생각한다.
그냥 다 밀어버릴까?
시원하게, 아무 생각 없이, 아주 깨끗하게.
그런데 막상 상상해 보면 또 아깝다. 여기까지 기르느라 버텨온 시간들이 떠오른다. 샴푸 할 때마다 엉키고, 말릴 때마다 귀찮았던 그 모든 순간들을 "그냥"이라고 부르기에는, 나름의 애정이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사람들도 종종 묻는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든, 어느 정도 나를 아니 사람들이든, 결국 비슷한 질문을 꺼내온다.
"머리를 왜 기르는 거야?"
그럴 때마다 나는 늘 비슷하게 대답한다.
"그냥요. 기르다 보니 기르는 거예요. 딱히 이유 없어요."
그리고 그 말을 내 입으로 하면서도, 속으로는 생각한다.
정말 아무 이유도 없어서 그런 걸까?
나는 머리를 기르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그 사람에게 '주관'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자기 스타일이 확실하고, 남들이 뭐라든 자기 취향을 밀고 나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는 이미지. 어쩌면 그래서 나도 머리를 기르는 걸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어서."
그래서 나도 길러 보면, 나도 조금은 특별해지고, 조금은 개성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근데 누가 그렇게 묻기만 하면, 나는 왜 끝까지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까.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요."
"개성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요."
"나도 나만의 뭔가를 가진 사람이고 싶어서요."
이렇게 말해도 될 텐데, 괜히 민망해서인지, 혹은 나 자신이 그런 말을 믿지 못해서인지, 결국 "그냥요" 같은 말 뒤에 숨는다.
생각해 보면, 나는 예전부터 늘 누군가를 닮고 싶어 했다.
어릴 때, 반에 말을 재미있게 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아무 말이나 해도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고, 교실 분위기를 가볍게 바꾸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그 친구를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저렇게 말을 못 하지?'
'왜 나는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지?'
그래서 그 친구를 닮고 싶었다. 말도 잘하고, 사람들 반응을 보면서 농담도 던지고, 분위기도 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냥 어린 마음에 부러웠던 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때의 감정은 꽤 뚜렷하게 남아 있다. "나는 왜 저렇게 못하지?"라는 질문은, 모양만 조금 바뀌었을 뿐, 지금까지도 내 안 어딘가에서 계속 울리는 것 같다.
지금도 나는 비슷한 질문을 반복한다.
나는 왜 평범하게 사람을 만나지 못할까.
왜 사랑을 하고, 관계를 만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갈등이 생기면 풀어가고...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해내지 못하는 걸까.
왜 사람들 사이에 들어갈수록, 오히려 더 어색해지고, 더 불편해지는 걸까.
그래서 나는 자꾸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왜 이럴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어쩌면 나는 뭘 해야 하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 자리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결국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는다.
'아 나는 정말 바보구나'
'아무 생각도 없는, 아무것도 정하지 못하는, 휘둘리기 쉬운 인간이구나.'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 보이는데, 정작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해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리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점점 말이 심해진다.
가끔은 '아, 나는 진짜 병신인가 보다'라는 말까지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누구에게나 휘둘리기도 좋고, 버려지기도 좋은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쓰고 버리기 좋은, 그런 호구 같은 사람인 것만 같아서, 스스로를 더 미워하게 된다. 사람들이 봤을 때, 잘해 주면 다 받아주고, 거리를 두면 혼자 상처받고, 그러면서도 제대로 싫다는 말 한 번 못하는 사람.
그게 실제로 어떤 객관적인 사실인지와는 별개로,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는 자꾸 그런 쪽으로 결론이 나버린다. 이게 과한 생각이라는 걸 머리로는 어렴풋이 알면서도, 완전히 떨쳐 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한 번쯤은, 나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됐지?"
"언제부터 나는 나를 이렇게 취급하기 시작했지"
조금 더,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
하루 전에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떠올려 보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중학교 때, 초등학생 때, 유치원 때까지 가 보고 싶다.
어릴 때, 나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믿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뭘 하든 세상이 나를 받아줄 거라고, 누군가 나를 싫어할 거라는 상상조차 못 하던 때.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이 언제 꺼져 버렸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초등학교 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무언가를 물어봤다.
그 상황에서 나는 비겁하게 행동했다. 책임이 내게 돌아올까 봐, 혼날까 봐, 그저 나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자질을 했고, 그 와중에도 친구들 앞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때의 나는,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매우 비겁한 아이였다. 지금 돌아봐도, 그 행동은 분명 비겁했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또 다른 기억.
그때 나는, 누가 됐든 나를 좋아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호의적일 거라고, 근거 없이 믿던 시기. 그런데 나에게 화를 내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왜 화를 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나에게 그러지?"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막연하게 느꼈던 것 같다.
또 다른 기억.
나는 친구들이 나를 버려두고, 다른 사람들끼리 놀러 가버렸다고 느꼈다. 스스로 '버려졌다'고 결론을 내린 나는, 화가 나서 텐트에 숨어 버렸다. 밖에서 사람들이 웃으며 노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나가는 대시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결국 엄마가 나를 끌고 나왔다.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 대시 말해 주었다.
"같이 놀아 줘."
그 장면이 이상하게도 강하게 남아 있다.
나는 그 자리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스스로 나가서 "나도 껴 줘"라고 말하지 못했던 그 순간이.
중학생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나와 친하다고 생각했던 동급생이 있었다.
그 친구가 어느 날부터 다른 사람과 더 자주 어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화가 났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기분이 나빴다.
생각해 보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랬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 때는 괜찮으면서,
누군가가 나를 빼고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거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건 괜찮고, 남이 하면 싫은'
그런 모순된 감정이 내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그런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면, 결국 결론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다 내가 잘못한 거겠지."
"지금도 나는 변명만 하고 있을 뿐, 결국 문제는 나인 것 같다는 생각으로 흘러간다."
정말로 모든 게 다 내 잘못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마음은 자꾸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생각은 더 극단으로 튀어 버린다.
가끔은 이런 생각까지 떠오른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으면 안 되는 사람인가.
누구와도 눈을 마주쳐서도 안 되고,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어서 안 되는 사람인가.
그냥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스쳐 지나가야 하는 존재인가.'
실제로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믿어서라기보다,
마음이 지치고 작아질 때면, 자꾸 이런 쪽으로 기울어 버린다.
그래서 문득,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그냥 다 포기해 버릴까.
사람과의 관계를, 기대를, 가능성을, 전부 다 내려놓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 포기 목록에는 당연히 나 자신도 포함된다.
나에 대해 제일 먼저, 제일 크게 포기하자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기대하지 않고, 나에게도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그러면 적어도, 내가 먼저 다가가서 상처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다가온다 해도, 그건 별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그저 지나가는 인연일 뿐, 특별한 이유도 목적도 없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좀 편해질까 하는 마음과,
이렇게까지 나를 포기해 버리면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같이 끼어있다.
나를 지키려는 건지, 정말로 버리려는 건지, 나 자신도 헷갈리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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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 생각한다.
머리를 밀어버릴까, 그대로 둘까.
포기할까, 한 번만 더 버텨볼까.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내가 기르고 있는 건 머리인지,
아니면 이런 복잡한 생각들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일단 오늘은,
머리를 밀지 않고 하루를 더 살아 보기로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기르다 보니 기르는 것처럼,
살다 보니 조금 더 살아 보기로 한다.
아마 지금의 나는,
그 정도 이유면 충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