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 하나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온다.
그 '나는' 입을 연다. 목소리는 내 것이지만 톤이 다르다. 더 어리고, 더 절실하다.
"기억나? 그날 밤."
무슨 날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계속된다.
"전화를 끊었잖아. 다섯 번이나 걸려왔는데. 넌 '피곤하다'고만 말하고 끊었어."
가슴이 조금 아리다.
"그 사람은 울고 있었어. 너도 알았잖아. 근데 넌 듣기 싫어서. 그래서 버렸지. 나를."
그 '나'가 한 걸음 더 다가온다. 얼굴이 조금 더 또렷해진다. 내 얼굴이지만 눈빛이 다르다. 더 간절하고, 더 살아있다.
"난 그날 밤, 전화기를 붙들고 다시 걸고 싶어 했던 너야. 근데 넌 날 묻어 버렸어. '귀찮다'는 이유로."
입을 열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흐릿해진다. 하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나를 바라본다. 원망도, 분노도 아닌, 그저 슬픈 체념이 담긴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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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나'가 나타난다. 이번엔 더 어린 얼굴이다. 아마 스무 살쯤? 아니, 그보다 더 어릴지도.
"나 기억해?"
고개를 젓는다.
"넌 오래전에 날 버렸어.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기억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무언가... 그림? 음악? 글?
"그림 그리는 거. 넌 정말 좋아했잖아. 아침까지 그리고, 손에 물감 묻히고, 캔버스 냄새 맡으면서."
그 '나'의 손에는 물감이 묻어 있다.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마르지 않은 채로 반짝인다.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이걸로 먹고살 수 없어'라고 생각하고 붓을 버렸지. 부모님이 뭐라 했을 때, 넌 고개를 끄덕였어."
가슴이 묵직해진다.
"난 그때 그리고 싶었던 그림들을 아직도 품고 있어. 근데 넌 날 쓸모없다고 생각했어. '현실적'이 되기 위해서."
그 '나'가 물감 묻은 손을 들어 허공에 무언가를 그린다. 선이 공중에 남는다. 아름답지만 슬프다.
"넌 날 버리고 '현실적인 사람'이 됐어. 근데... 지금 넌 뭐야? 사물이잖아."
그 말이 가슴을 찌른다.
그 '나'도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물감 묻은 손을 흔들며. 그 손이 그린 선들이 공중에서 천천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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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나'는 다르다. 표정이 일그러져 있다. 이빨을 드러낸 채 입술을 깨물고 있다.
"넌 화내는 것도 버렸지."
그 목소리는 날카롭다. 지금까지의 '나'들과는 전혀 다른 톤이다.
"누군가 너한테 부당한 짓을 했을 때, 넌 화를 내는 대신 '괜찮아'라고 했어. 속으로는 불타는데 겉으로는 웃었지."
맞다 그런 적이 있었더. 여러 번.
"직장에서, 관계에서, 가족 안에서. 넌 항상 참았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 '나'가 주먹을 쥔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세게.
"난 그때 소리치고 싶었어. '이건 잘못됐어!' '이건 불공평해!'라고. 테이블을 엎고 싶었어.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어."
그 '나'의 주먹이 떨린다.
"근데 넌 날 억눌렀어. 날 삼켰어. 그리고 '어른스러운 척' 했지."
한 걸음 더 다가온다. 그 얼굴은 내 얼굴이지만 너무 다르다. 너무 살아있다.
"난 여전히 화나있어. 그때도, 지금도. 근데 넌 날 여기에 가둬놨어."
침묵.
"넌 착한 사람이 아니야. 그냥 느끼기 싫어서 도망친 거야."
그 '나'가 돌아선다. 주먹을 쥔 채로. 등을 보이며 멀어진다. 어깨가 떨리고 있다. 울음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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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나'는 너무 작다. 거의 어린아이 같다. 열 살? 아니면 더 어릴지도.
말하지 않는다. 그냥 바라본다. 큰 눈으로, 아무 말 없이.
"... 넌 누구야?"
대답 대신, 그 '나'가 손을 내민다. 누군가를 잡으려는 듯 하지만 손은 허공만 잡는다.
상자 속의 나가 낮게 말한다.
"저건 혼자 남겨지는 게 무서워했던 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넌 그 두려움을 버렸어. '혼자가 편하다'라고 생각하면서. '난 혼자가 좋아'라고 말하면서."
어린 '나'는 여전히 손을 뻗고 있다. 하지만 닿을 곳이 없다. 잡을 누군가도 없다.
"하지만 진짜로 혼자가 좋았던 게 아니었지. 그냥 다시 버림받기 싫었던 거야."
어린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소리 없이.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온다.
"그래서 먼저 혼자가 되기로 선택한 거지.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그 어린 '나'는 울지 않는다. 눈물만 흐를 뿐, 소리는 없다. 얼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손만 계속 뻗고 있다.
"넌 그렇게 여기에 남겨뒀어. 영원히 손을 뻗고 있게."
그리고 어린 '나'가 천천히 흐려진다. 손을 뻗은 채로. 눈물을 흘린 채로.
사라지기 직전, 그 입술이 움직인다. 소리는 없지만 읽을 수 있다.
"외로워."
그리고 완전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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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나'가 모두 사라진 뒤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숨이 막힌다. 가슴이 조여 온다. 무언가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울음인지 비명인지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나오지 않는다.
나는 사물이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사물은 울지 않는다. 사물은 소리치지 않는다.
주변의 수백의 '나'들이 여전히 조용히 서 있다. 그들 모두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버려진 순간들, 외면당한 감정들, 억눌러진 목소리들.
모두 나였던 것들.
상자 속의 나가 미세한 미소를 짓는다. 그것은 인간의 미소가 아니라, 사물이 인간을 흉내 낼 때 만들어내는 완벽하지 않는 곡선이다.
"이제 너는- 어디에 설 것인가."
그리고 공간 전체가, 마치 고요한 호수 위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한 번 크게 울렁인다.
균형을 잃는다. 수많은 나들이 동시에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다.
그때,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린다.
딸각.
마치 문이 열리는 소리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