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말로 할 때와 글로 쓸 때의 미묘한 위화감이 생겼다. 생각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과 글로 적어내는 순간 사이, 그 감각이 미세하게 달랐다.
새벽이라는 감각만이 느껴진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이 5평 남짓한 작은 방을 은은하게 비춘다. 작은 불빛에 의지해 방 안을 둘러보며 물건들의 윤곽만 확인한다. 창 너머 세상의 분주한 소리마저 자취를 감추고, 깊이 가라앉은 정적이 이 새벽의 고요를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한다. 그 조용함이 나를 깨워 내며, 문득 지금이 새벽임을 깨닫는다.
깨어난 김에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거라는 예감이 든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지만 생각이 자꾸만 떠오른다. 몸의 긴장을 풀고 허공을 응시하며 그저 잠이 오기를 바라지만, 머릿속의 잡생각들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탁자 위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든다. 어두운 화면이 켜지며 눈앞에 강한 빛이 번진다. 새벽 2시 45분. 또다시 새벽에 깨어났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잠들기 힘들어졌고, 오늘도 역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생활이 한 달 가까이 반복되면서 몸도 마음도 점차 피폐해져 가는 느낌이 든다. 결국 벽을 더듬어가며 불을 켠다. 방이 환해지면서 더 이상 잠을 자려는 마음을 접는다.
이 시간에 깨어 있으면, 마치 세상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 홀로 깨어 있는 듯한 이 새벽, 온 세상이 잠들어 오직 나만이 이 시간에 존재하는 듯한 고요가 마음속에 잔잔히 내려앉는다.
고요 속에서 커피가 떠오른다. 진하고 달콤한 커피. 무심히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내린다. 따뜻한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김이 올라오는 잔을 천천히 입에 가져간다. 한 모금 마신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가며 속을 데우고, 그 따뜻함이 나를 조금씩 깨운다. 커피가 목구멍을 지나 위로 내려가며, 피곤한 속이 서서히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나는 다른 장소로 나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 자신을 떠올린다. 큰 직사각형이나 정사각형에 가까운 공간 안에 여러 가지가 놓여 있다. 두 측면은 온통 창으로 이루어져 밖에서도 안에서도 서로를 볼 수 있다. 벽의 개념을 무색하게 만드는 투명한 면은, 그저 경계의 역할만 남긴 채 안과 밖을 아우른다.
창 너머, 지나가는 사람들, 바삐 돌아가는 도시의 풍경이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보이다가도, 이내 살아 움직이는 듯 이어진다. 나머지 벽 쪽에는 테이블이 줄지어 있고, 사람들이 각자의 일에 몰두한 채 앉아 있다. 그들의 표정은 무심하고 어쩌면 피곤해 보인다. 서로에게 큰 관심 없이, 마치 자신만의 바쁨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각자의 사정과 고단함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이 큰 공간 속에서 모두가 마주 보며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듯한 이 광경 속에서, 나는 혼자 앉아 내 앞에 누군가가 있다고 상상해 본다. 내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웃고 있을까, 아니면 아무 표정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을까?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의 모습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현실의 누군가가 내 앞에 앉아 “안녕”이라고 말을 걸어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눈을 보며 “안녕”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런 상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나는 아무도 없는 빈 의자를 한 번 쳐다볼 뿐이다. 그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허공을 보며 가볍게 웃고 있을까, 아니면 무심하게 한 번 쳐다볼 뿐일까? 결국, 내 앞의 의자는 빈 채로 남아 있다.
이윽고 나를 에워싼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의 대화 소리, 웃음소리, 전화 통화 소리. 세상은 바삐 돌아가고 있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소리, 스쳐 지나가는 계절의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그 많은 소리 속에 나를 부르는 소리는 없다. 세상 어디에도 포함되지 못한 채, 외따로 떨어져 있는 나에게 들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이어폰을 귀에 꽂아 노래를 들으며 이 소리들을 차단해도, 이 노래마저도 단지 내 귀를 막기 위해서일 뿐이다. 내가 아닌 다른 세계를 차단하고자 들려오는 소리에 불과하다. 마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나를 찾는 소리는 이곳에 없다. 문득 떠오르는 고립감과 고요 속에서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아픔도 걱정도 없이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 나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아마 누구든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관계없이 그 속에서 공포를 느낄 것이다. 죽음이라는 끝, 더 이상 앞이 없다는 것.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아픔과 무서움, 남겨질 것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모든 것에서 벗어나 조용히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남은 생을 포기하고 그 방법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 방법이 무엇이든 찾아낼 것이다.
가끔 꿈속에서 죽음을 경험한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 어김없이 마지막에는 눈을 뜬다. 지금까지 꿈속에서 경험한 죽음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는 식이었다. 칼에 찔릴 때는 내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며 생명이 점점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피가 흐르며 생명이 흩어져가는 감각. 그러다 모든 힘이 사라지고 눈앞이 흐려질 즈음,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이자 편안해졌다. 무한한 평화가 나를 감싸는 듯했다.
이렇게도 죽고 저렇게도 죽어보며 느낀 것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과, 희망을 품지 않으면 편안하다는 것. 다시 말해, 죽음을 받아들이면 고요가 찾아온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