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좁은 방 안, 서늘함이 느껴진다. 빛이 유일하게 들어올 수 있는 벽 한쪽은 블라인드로 가려져,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빛줄기를 차단하고 있다.
“오늘의 최저 기온은 영하 1도입니다. 외출 시 따뜻하게 옷을 입어주세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또렷한 음성이 막 깨어나 몸을 추스르는 내 머릿속으로 스며든다. 오늘은 춥다. 만약 외출을 해야 한다면 따뜻하게 입어야 한다. 단순한 사실들을 확인하며, 이불속에서 벗어나기 싫어하는 내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화장실 문을 열고 거울 앞에 선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탓인지 화장실엔 냉기가 맴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마지막으로 외출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틀 전인가, 일주일 전인가? 알 수 없다. 밖에 나가지 않는 건 더 이상 가야 할 곳도, 갈 곳도 없기 때문이다. 어딘가 내 자리가 있었다면, 그 자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겠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서늘한 방 안의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따뜻함을 느끼고자 한다. 잃어버렸던 온도를 잠시 회복하고 나서 이불 밖으로 나와, 옆에 두었던 휴대폰을 집어 든다.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 나의 자리가 사라진 이후, 모든 연락을 끊기로 결심했고 메시지 역시 확인하지 않은 채로 두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A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이전에 쌓인 메시지들을 하나씩 읽어나간다. 흩어져 있는 글에서 건져 올린 것은 “11월 18일,” “모임,” “2시”라는 정보였다. 곧이어 “11월 18일 2시에 오랜만에 다 같이 만나자”라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날짜와 시간 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라 오늘이 며칠인지 몰랐는데, 오늘이 바로 그 약속 날이었다. 하필이면 약속 당일에 메시지를 읽게 된 것이다. 만약 이미 지나버린 약속이었다면 마음이 덜 불편했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이 불편해진다.
고민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린다. A로부터 온 전화다. 받을지 말지 망설여진다. 이 전화를 받으면 A와의 약속에 참석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A는 주위에 따뜻함을 주는 사람이다. 내가 피하려 할수록 더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따뜻함을 받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기에, 다가가기가 어렵다. 시간은 흘러 전화가 계속 울리고, 망설임 속에서 결국 전화가 끊긴다. 그러나 두 번째 전화가 울린다. A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결국 전화를 받는다.
“왜 이렇게 늦게 받는 거야? 오늘 2시에 만나는 거 알지?”
A의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나를 다시 일상으로 끌어당긴다.
“미안, 방금 확인했어. 오늘 2시 맞지?”
“응, 맞아. 예전에 만났던 그곳에서 보자. 늦지 말고.”
“알겠어. 그럼 조금 있다가 봐.”
마음에 없는 말과 허울뿐인 대화로 자연스러움을 가장하며, 나는 A와의 약속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오랜만의 통화라 어색할 줄 알았는데, 전혀 내색하지 않는 A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결국 오늘 외출하기로 했으니, 준비를 해야 한다.
외출 준비를 하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다시 본다. 한때 따뜻함을 동경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서늘해진 공기만 남은 방 안에서 고요히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옷을 갈아입는다. 아침에 들었던 아나운서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오늘은 춥다. 그러니 따뜻하게 입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따뜻함을 몸에 품고 나가야 한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오랜만의 외출이라 조금 빨리 나가보기로 한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는다. 차가운 손잡이가 바깥공기의 매서움을 전해준다. 한 걸음 내딛고 바깥으로 나간다. 모든 걸 끊기로 결심하고 돌아섰던 그날 저녁의 서늘한 공기와 같은 차가움이 몸을 감싼다. 찬 바람이 몸을 때리고, 바닥에 흩날리는 낙엽들은 바람에 이리저리 움직인다.
마치 추운 대지를 맨몸으로 걷는 듯한 느낌이다. 옷을 입고도 여전히 춥다. 이 추위는 단순히 몸의 온도 문제가 아니다. 어딘가 추상적인 따뜻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따뜻함을 되찾기엔 나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약속 시간 전 잠시 시간이 남아 근처 카페로 들어간다. 바깥과 차단된 밀폐된 공간은 따뜻함으로 가득하다.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를 찾는다. 한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오후의 햇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리가 있다. 따스한 햇빛이 몸에 닿아 서서히 체온이 오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햇빛이 뜨겁게 느껴진다. 결국 블라인드로 창을 막아버렸다. 들어오던 햇빛은 블라인드에 가로막혀 다시 밖으로 나아간다.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긴다. 따뜻함을 원하면서도 내가 스스로 그것을 막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 햇빛은 단순한 온도를 넘어, 이 자리가 나의 자리라고 알려주는 위로 같은 따뜻함이었다.
블라인드를 다시 열어보려 했지만, 이미 따뜻했던 햇빛은 구름에 가려 사라진 뒤였다. 이렇게 또 따뜻함을 놓쳐버린 게 아닐까?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햇살을 잃어 아쉬운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동시에 따뜻함이란 단순히 빛이나 온도로 채울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 따뜻함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주는 힘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 후 A로부터 메시지가 온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어. 천천히 와도 괜찮으니까.”
A의 메시지를 보며, 약속을 부담스러워했던 이유가 단순히 사람과의 관계를 꺼려서가 아님을 깨닫는다. 내가 느끼던 공허함과 차가움은 따뜻함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 이미 속할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감정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A를 만나러 가야 한다. 그러나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방 안에 쳐진 블라인드가 떠오른다. 미뤄둔 것을 해결하지 않고선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미안, 3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중요한 일이 있어.”
답장을 확인하지 않은 채 집으로 향한다. 방 안에 가려져 있던 블라인드를 열어야 한다.
조금 더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기 위해 목도리를 고쳐 매고 천천히 카페를 나선다. 차가운 바깥공기가 여전히 몸을 파고들지만, 이번엔 따뜻함을 찾아가는 길이란 생각에 불편하지 않다. 겨울나무 사이로 남은 잎들이 바람에 춤추듯 흩날리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내 모습과 닮아 보였다. 이제는 사라진 듯해도 어딘가 남아 있는 따뜻함의 조각처럼.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방 안으로 들어선다. 서늘한 방 안 한쪽에 있는 블라인드를 천천히 걷는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듯한 따스한 햇빛의 착각이 들며 방 안이 조금 더 밝아진다.
그리고 핸드폰이 울린다. A에게서 온 메시지다.
“응. 기다리고 있을게.”
다시 밖으로 나간다. 남겨진 방 안의 창으로 작은 햇빛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