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길복순> 리뷰 : 살인하는 엄마와 동성애하는 딸

by 구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컨디션 난조로 오랫동안 영화를 전혀 보지 못하다가, 실로 오랜만에 전도연 배우가 주연한 영화 〈길복순〉을 봤다. 어떤 역이든 다양하게 해보고 싶지만 제안이 들어오지 않아서 못한다는 전도연 배우가 50대에 액션영화를 찍었다니 이것만은 꼭 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도연의 액션은 정말 멋있었는데 특히 주로 좁은 공간에서 칼을 쓰는 장면에서 날렵하게 뛰어들어 묵직하게 부딪칠 때의 임팩트가 너무나 근사했다.


그런데 의외로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복순과 그의 딸 재영의 관계였다!! 보통 킬러 아빠들에겐 가정을 완벽히 돌봐주는 유능한 부인이 있고, 딸도 때가 되면 착실하게 적에게 납치되어 아빠의 커리어에 박차를 가해주지만, 길복순은 그저 혼자서 일-가정을 양립시키느라 고군분투한다. 그렇게 악착같이 키운 딸은 이 세상 모든 딸이 그렇듯 엄마에게 사사건건 대들고 자신의 의견을 쏟아놓으며 복순을 몰아세운다. 복순은 이 세상 모든 엄마와 달리 자신이 딸보다 강하다는 걸 아주 잘 알기에, 말끝마다 엄마를 가르치려 드는 딸에게도 억울해하지 않고 순순히 자신의 삶을 반성하지만, 그 역시 여느 엄마와 마찬가지로 딸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 “절대 엄마처럼 살지 말고” 번듯하게 사회에서 인정받는 삶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재영의 불안요인은 킬러기질이 아니라 동성애였다. 재영에겐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그 친구는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해 재영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있었고, 동급생 남자 중 하나는 그들의 키스 사진을 가지고 재영을 협박하고 있는 상태였다. 학교에서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던 재영은 결국 엄마 복순에게 울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한다.


나는 지금까지 본 여러 영화/드라마의 엄마-자녀 커밍아웃 장면 중에서 〈길복순〉의 커밍아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상당히 동등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장면과 비교해 보자. 먼저 해나 개즈비의 스탠드업 코미디 〈나의 이야기〉에서 개즈비가 엄마에게 커밍아웃했을 때, 그의 엄마는 “그런 걸 왜 말하는 거니? 엄마가 알 필요도 없는 건데. 만약 이 엄마가 살인자라고 고백하면 넌 어떻겠니?”라고 답한다. 여기서 개즈비는 죄를 지은 사람이고, 그의 고백은 자신이 지은 죄를 괜히 엄마에게 알려 엄마까지 곤경에 빠뜨리는 일이다. 한편 넷플릭스 드라마 〈하트 스토퍼〉에서는 주인공 닉이 자신이 바이섹슈얼임을 밝히며 눈물을 흘리자 그의 엄마가 따뜻한 표정으로 그를 안아주며 “말해줘서 정말 고맙다. 혹시나 엄마 때문에 말 꺼내기 어려웠다면 미안해.”라고 답한다. 여기서 닉은 자신의 정체성을 엄마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두려워하는 입장이고, 그의 엄마는 변함없이 그를 사랑한다며 그를 안심시켜주는 입장에 선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듯, 고백은 외부와 분리된 고립된 개인(의 내면)을 탄생시키는 극적인 발화다. 그렇기에 평범한 개인이 각성하여 고유한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고백 장면은 서사의 클라이맥스를 차지한다. 액션영화인 〈길복순〉에서는 복순은 최종 적수의 결정적 약점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순간 진정하고도 유일한 승자가 된다. 휴 그랜트가 주연을 맡은 연애영화에서 온갖 오해와 갈등을 거쳐 마침내 이루어지는 사랑의 고백은 시종일관 싱겁고 비실비실하던 휴 그랜트 캐릭터를 사랑을 쟁취한 연인으로 탄생시킨다. 〈라스트 제다이〉와 같은 우주모험담에서 루크 스카이워커는 자신의 과오를 고백함으로써 좌절한 은둔노인에서 주인공 레이의 결정적 조력자로 거듭난다. 즉, 고백이라는 행위는 어떤 사람을 그 고백의 고유하고 유일한 주인으로 만들어준다. 따라서 고백을 하는 순간 그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분리되고 다른 사람들과도 떨어져 나와 단독적이고 외로운 근대의 개인이 된다.


이때 고백은 마음의 고백(나는 당신을 사랑한다)이기도 하고, 죄의 고백(내가 그를 죽였다), 이기도 하며, 정체의 고백(나는 레즈비언이다)이기도 하다.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이러한 고백이 고백하는 사람을 근대의 개인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죄의 항목과 규범의 틀 자체를 만들기도 한다고 말한다. 즉, 계율이 먼저 있고 그것을 어긴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사람들을 고해성사의 제도 속에 넣어놓고 계속 고백을 시키면서 죄의 내용을 수집하고 그 죄의 항목을 구성하며 그러한 행동을 제약하고 금지하는 권력을 구축해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고백은 죄의 내용과 그 죄를 판가름하는 규범, 그리고 그 규범을 집행하는 제도와 권력을 만든다.


내가 그간 자녀가 엄마에게 커밍아웃하는 장면을 보며 불만스러웠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당사자가 고백의 내용인 자신의 정체성에 불안을 느끼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충분히 자긍심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 고백이라는 행위 자체는 그 말을 얼마간 죄의 고백으로 만들며 동시에 그 고백을 듣는 사람(엄마)를 그 죄를 청취하고 심판하며 상벌을 집행하는 제도 및 권력의 위치에 놓는다. (여기서 나는 자녀가 커밍아웃을 할 때 엄마가 처신을 더 잘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신념과 마음이 어떻든 고백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라는 구조적 입장과 위치로 인해 결정되는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이때 묵묵히 고백을 듣는 사람은 마치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처럼 개인으로서의 모습을 감춘 상태이다. 그가 평소에 어떤 행실을 보였든 어떤 자격이 있든(즉 어떤 개별적 개인으로 살아왔든) 상관없이 고백을 듣는 쪽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은 상대의 고백을 듣고 판단하고 모종의 반응을 보이는 제도의 위치에 놓인다.


그렇기에 해나 개즈비의 엄마는 고백 자체, 고백이 만들어내는 위치관계 자체에 거부감을 보인 것이다. 호주의 보수적인 시골에서 살아온 그는 개인적으로 ‘동성애=죄=살인’이라는 신념 체계 속에서 살아왔다. 그렇기에 딸이 고백을 한 이상 자신은 꼼짝없이 그 고백을 듣고 판결하고 집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며, 그때 자신이 동원해야 할 준거는 ‘동성애=죄=살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고백이 발생하는 순간, 자신의 판결에 의해 딸은 죄인이 되고 본인은 딸을 죄인으로 키운 실패한 엄마가 될 것임을 직감한 엄마는 개즈비에게 ‘왜 여자를 좋아하냐’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걸 내게 고백했냐’고 비난한다.


한편 〈하트 스토퍼〉에서 닉의 엄마는 동성애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게이와 바이의 차이도 알고 있고, 자신에게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힘겹게 고민했을 아이의 마음을 위로할 줄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엄마 자신은 섹슈얼리티의 세계에 전혀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개인적 사연도 없다는 듯, 오로지 자녀의 고백을 듣고 판단하고 반응하는 존재로서 행동한다. 엄마는 자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은 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따뜻하게 아이를 존중하고 격려하지만, 고백이라는 구조는 꼼짝없이 엄마를 죄인의 고백을 긍휼히 듣고 너그러이 그의 죄를 용서하여 원래 자리에 복귀시켜주는 인자한 권력자의 자리에 놓는다. 그래서 나는 그가 정말 좋은 엄마라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가 말끔히 개인의 얼굴을 지우고 제도의 입장에서 행세하게 되는 상황이 못마땅했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트위터에서는 “닉 걱정 마, 너희 엄마 전생에 동성애여왕이었어.”라는 코멘트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 닉 엄마 역을 맡은 배우 올리비아 콜먼이 영화 〈더 페이버릿〉에서 여자 애인을 거느린 영국 여왕을 연기함)


그러나 〈길복순〉에서 재영이 엄마에게 레즈비언임을 고백하는 장면은 사뭇 다르다. 길복순은 말 그대로 살인자인데다가 그 사실을 딸에게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고백을 듣는 자’의 익명적 위치에 서지 못한다. 딸의 고백을 처음 듣고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다 복순이 “왜 그런 걸 엄마한테 얘기를 안 했어? … 내가 너를 이렇게 몰라도 되니?”라고 화를 내자, 재영은 곧바로 “그러는 엄마는? 나한테 솔직해?”라고 반문한다. 복순은 딸의 고백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고백을 해야 하는’ 입장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잠시 간격을 두고 재영이 다시 한 번 본격적으로 커밍아웃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재영은 울면서 고민을 털어놓지만 그럼에도 그는 죄를 고하는 죄인이 되지도,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 피고가 되지도 않는다. 푸코는 ‘신자들의 부도덕한 성생활’에 대한 고해성사를 듣는 교회야말로 성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데, 이 장면에서 상대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이 훨씬 강한 쪽은 오히려 고백을 하고 있는 재영이다. 재영은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솔직하게 전부 털어놓으면서도 계속해서 “엄마도 무슨 일 있지?”, “나 엄마 가방에서 X 본 적 있다.” 등등 온갖 말로 추궁하며 엄마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요구한다. 엄마가 조금씩 자신의 상황을 공개할수록 딸도 조금 더 스스럼없이 자신의 심정을 밝히는 그들의 말은 일방적이고 위계적인 고백이 아니라 동등한 거래나 상호적 대화에 가까워진다. 그렇기에 복순이 여느 좋은 엄마들처럼 “네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숨기고 살아야 돼?”라고 말할 때, 나는 그것이 권력자가 내려주신 죄사함이 아니라, 얼굴을 감춘 자애로운 제도 권력이 끝끝내 되지 못한 복순이 살인을 일삼고도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고유한 개인으로서 허심탄회하게 던지는 공감의 말로 들렸다.


이 고백으로 서로의 사랑/죄/정체(의 일부)를 알게 된 뒤, 복순은 자신과 동료들이 벌이는 살인의 의미에 대해 이전보다 한결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자식의 커밍아웃을 통해 엄마의 개인적 삶이 변화했다는 결말은, 자식의 커밍아웃 덕분에 엄마도 퀴어를 조금 더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서사에 비해 훨씬 만족스러웠다. 후자에서 엄마는 여전히 ‘퀴어 자녀의 고백을 듣고도 자식을 사랑해준 엄마’일 뿐 다른 어떤 개인의 특성도 사연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는 오히려 딸이 살인자인 자신을 혐오하거나 추방하지 않았을지 걱정하다 조심스레 안도하는 복순과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친구들을 더욱 담대하게 대하는 사람으로 성장한 재영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강조하건대, 나는 고백을 들을 때 좋은 태도와 나쁜 태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고백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누군가의 사연은 너무나 내밀하고, 고백을 하며 비로소 독자적 존재로 갓 태어난 개인은 더없이 연약하고 외로워서, 그 고백을 듣는 사람이 아무리 조심한들

상처받기 쉽다. 게다가 고백이 이뤄지는 상황과 관계는 전부 제각각이다. 따라서 상처를 주면 무조건 실패라고 단정하는 것도 허무하고 어떤 대응이 더 바람직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찜찜하다. 차라리 저마다의 방법으로 실패하는 부지기수의 고백 속에서 서로 주고받은 상처를 포기하지 않고 책임지려는 태도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게 서로를 믿고 책임지기 위해서는 고백을 들을 때 이따금 자기도 이름과 사연과 죄를 가진 개인임을 상기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를 짚어보고 싶다.


덧. 간간이 극도의 남초업계인 청부살인 업계에서 초인적인 능력으로 홀로 성공한 중견 여성의 사회생활을 묘사하겠다는 의욕도 재미있었다. 아마 이런 시니컬함이 이 영화의 감독인 변성현 님 특유의 감성이겠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복순의 능력을 추켜세우면서도 어딘가 여자가 잘나간다는 사실을 억울해하는 남자들과 그런 남자들의 질투를 적당히 잘난 척과 엄살로 받아넘기며 관계를 유지하는 복순의 관록 같은 것 말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뛰어난 여성이 한 명 더 나타나면 여성의 세력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홍일점의 자리가 대체될 뿐이라는 남성연대 사회의 룰 속에서 어떻게든 같이 살아남으려는 후배 영지와 복순의 관계에 대한 묘사도 정말 짜릿짜릿했는데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은 너무 아까운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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