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톰보이> 리뷰: 젠더를 횡단하는 로레의 모험은

by 구감

<톰보이>는 미카엘/로레가 말 그대로 젠더를 트랜스하는 모험의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미카엘은 단지 '여성성'이라는 젠더 경계를 벗어날 뿐 아니라, 남성성을 흉내내보기도 하고, 새로운 섹슈얼리티를 경험해보고 새로운 몸을 만들어보기도 하며,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계속 오간다.


이 모든 일은 로레가 새 마을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이 도입부부터 너무 좋았다. 새 마을로 이사올 때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정체성 세탁'을 꿈꾸지 않는가. 실수도 많고 아쉬움도 많던 과거를 청산하고, 이 마을에서는 진짜 잘 해봐야지. 과거와는 다른 내가 되어봐야지. 과거의 나를 알던 사람들 앞에선 쑥스러워서 못했던 시도를 해봐야지. 등등등. 우리가 이러한 꿈을 꾸게 되는 이유는 이사를 통해 새로운 자신의 모습에 도전해볼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로레에게 이 기회는 뜻하지 않게 마주친 아이의 질문으로 찾아온다. 이름이 뭐니? 아마도 지금까지는 그저 ‘여자답지 않은 여자아이’로 지내왔을 로레는, 이번엔 문득 아예 생물학적 성별의 경계를 넘어보기로 한다. 내 이름은 미카엘이야.


여자가 남자인 척 하는 것이 매우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끊임없이 역할놀이를 하며 세상의 질서와 규칙과 제도를 습득하는 아이들은, 성역할 역시 생활하고 놀이하면서 면밀한 관찰과 이해, 훈련과 암기를 통해 인위적으로 학습한다는 사실을 특히 미카엘과 잔이 집에서 노는 모습으로 세심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엄마아빠아들딸'이 모이면 세트가 완성되는 카드놀이나 여배우와 남기자의 인터뷰를 흉내내는 역할놀이, 남자야 여자야? 로 시작하는 스무고개 놀이로 빡시게 젠더/성별 이분법과 이성애주의를 배워가던 미카엘에게 ‘남자’가 되는 법을 배우는 일도 그렇게까지 다를 것은 없다.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관찰한 뒤 자신도 그런 태도를 그대로 수행해보는 것도, 머리카락으로 콧수염을 붙인 뒤 남자 손님 흉내를 내며 미용실 놀이를 하는 것도 늘 하던 일이다.


그러나 이번엔 젠더와 더불어 성별의 경계를 넘어보고자 했기에, 미카엘의 이번 도전은 '남성적 역할'뿐 아니라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몸'을 구현하는 데에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미카엘은 웃통을 벗어도 남자다워 보일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남자아이들과 다 같이 서서 소변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숨기려고 몰래 따로 볼일을 보다 창피를 당한다. (이러한 문제는 FtM 트랜스젠더가 겪는 가장 대표적인 어려움이기도 하다.)


이렇게 젠더와 성별의 경계를 넘는 시도는 또한 새로운 섹슈얼리티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어진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처음부터 미카엘은 리사를 좋아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초에 남자 이름을 댄 이유가 리사의 (다분히 섹슈얼한) 기대에 얼른 부응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남자로 패싱된 덕에 미카엘은 좋아하던 리사와 '자연스럽'고 '공식적'으로 커플이 되어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고, 이렇게 리사와 사랑하는 관계를 구축했기에, 미카엘은 중간에 흐지부지 그만두지 않고 계속해서 젠더를 트랜스하는 모험을 이어가게 된다.


이 위태로운 모험의 백미는 물론 수영하러 가는 장면이다. 수영을 하려면 좋아하는 여자친구와 다른 동네 친구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이 ‘남성으로 구성한 몸’을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원피스 수영복을 가위로 자를 때부터 나는 너무 불안했다. 어렸을 때 가당치도 않게 어설픈 눈속임을 열심히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렇게 허리끈도 없이 가위로 썽둥 잘라 만든 수영복 따위는 물에서 놀다 벗겨지기 십상일 것 같았다. 속에 넣은 찰흙도 발장구 몇 번 풍덩거리면 금세 삐져나오거나 도망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물놀이는 즐겁고 평온하게 끝났고, 덕분에 미카엘과 리사는 더욱 다정해진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하루를 마치고, 미카엘이 수영복에 넣었던 찰흙을 조용히 젖니 모아둔 통에 담을 때 나는 정말 기립박수를 칠 뻔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아니 셀린 시아마가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대단할 수가 있어?? 어떻게? 왜? 그 찰흙을 담아둘 곳으로 젖니 모아둔 통만큼 적절한 곳이 어디 있을까? 치아는 변화하는 인간의 몸에 맞추어 공식적으로 ‘변태’를 하는 유일한 부분이다. 작은 턱에 맞게 났던 젖니가 턱이 커짐에 따라 전부 빠지고 새 몸에 맞는 영구치로 바뀌었던 것처럼, 오늘은 그 찰흙이 미카엘의 몸에 맞는 신체의 일부였고 그게 빠졌으니 젖니와 함께 보관할 수밖에. 젠더와 성별의 경계를 넘어보는 미카엘의 모험을 함께했던 그 찰흙을, ‘이것도 역시 어릴 적 젖니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네 몸이었던 거야’ 하면서 나란히 의미화해주고 싶었던 셀린 시아마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특히 남자애들과 함께 볼일을 보지 못해서 바지에 실례를 했던 날 밤에는 몰래 빨아 벽장에 널어둔 바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 때문에 미카엘이 잠을 설쳤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에 위안이 된다.


젠더와 더불어 성별과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트랜스하던 미카엘의 모험은 결국 가족과 주민등록(학교)이라는 실체적 제도를 맞닥뜨리며 말 그대로 ‘제압’된다. 미카엘이 제압되는 과정은 경계를 위반한 자, 특히 트랜스젠더가 발각되고 배제되는 전형적 과정을 따른다.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지낼 때에는 마치 이대로 제도에 속할 수 있는 것만 같다가, 동생을 밀친 아이와 주먹다짐을 하는 문제를 만들자마자 순식간에 그는 ‘정확히 정체를 밝혀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엄마는 미카엘의 정체를 표시하기 위해 표시 외에 아무 의미가 없는 원피스를 입히지만, 미카엘과 함께 경계를 넘었던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미카엘은 저 원피스로 표시될 수 있는 정체를 가진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미카엘에게 ‘여자’라는 이분법적인 성별표시를 해버리는 건 너무나 폭력적이라는 것을. 미카엘의 몸에 그야말로 뒤집어씌워져 있는 저 원피스의 말할 수 없는 억지스러움이야말로 그에게 남자나 여자의 고정된 틀을 뒤집어씌우는 일이 얼마나 억지스러운지를 즉각적으로 웅변한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해 온 미카엘의 모습은 그 원피스를 뚫고 나온다.


우리끼리는 아무래도 괜찮지만, 국가적 제도를 거스를 수는 없지 않냐는 엄마의 설득에 뜻을 접어보려 했던 미카엘은, 처음 자기를 이 모험으로 이끌어주었던 리사 앞에서만은 끝내 뜻을 꺾지 못하고 뛰쳐나간다. 그리고 자신에게 더없이 이물 없는 놀이터였던 숲 속에 가서, 인위적이고 억압적일 뿐인 원피스를 벗어두고 나온다.


난 이미 너무 괴로웠기에 여기서 영화가 끝나도 좋다고 생각했다. 멋모르고 과감한 모험을 시작한 미카엘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시련을 거친 뒤, 숲 속에서 탈피의 제의를 마치고 홀로 걸어나왔으니 이제 대충 끝나도 되는 거 아니냐고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시아마는 그렇게 대충 이야기를 마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카엘은 리사의 얼굴을 보지 않고 뛰쳐나왔기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동네친구들과 함께 리사는 인간은 남자 아니면 여자이며 사랑은 이성끼리만 해야 한다는 제도 안에서 미카엘이 한 짓은 ‘사람들을 속인’ 일인 동시에 ‘역겨운’ 일이라고 외치며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을 확인하는 방법은 **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장면의 고통은 자세히 말할 수 없다.


그 이후 리사는 어떻게 살았을까.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아마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제도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제도는 규격에 담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맞지 않는 존재를 처리하기 위한 자리도 제도적으로 만들어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맞지 않는 존재를 처리하는 방법을 만드는 것을 통해 제도를 구축한다) 이 성차별적 제도 역시 이미 미카엘과 같은 존재의 자리를 마련해두었다. 좀 이상한 애, 변태 같은 애, 거짓말쟁이, 미친 애. 리사도 얼마든지 미카엘을 제도가 만들어 둔 그 자리에 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자기가 알던 세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지 않고도 편안히 지낼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은 별 뜻 없이 뱉은 말조차 좀처럼 철회하기 싫어하는 존재가 아닌가. 만일 미카엘이 변태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자기가 미카엘에게 했던 짓의 의미에 대해서도 완전히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그래서 몇 달 후 미카엘의 집에 리사가 찾아온 걸 본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리사가 어려운 길을 가기로 했구나. 리사가 자기가 알던 세계의 아늑한 품에서 나와 그곳을 의심하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감수하겠다고 용기를 냈구나.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의미를 정직하게 대면하기로 했구나. 미카엘을 이미 알던 질서에 맞추어 쉽게 재단해버리지 않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를 더 자세히 세심히 알아보기로 했구나.


그러니 리사의 질문은 다시 “네 이름이 뭐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카엘은 “내 이름은 로레야”라고 대답한다. 이게 ‘난 사실 미카엘이 아니라 로레야’라는 뜻일까? 그럴 리가. ‘이 마을에서는 미카엘인 모습만 보여줬지만 난 로레이기도 해/했어’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 장면에서 미카엘/로레는 이 두려운 여정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을 안고 찾아온 동반자를 만난다. 그래서 이제 성차별적 제도의 경계를 의심하고 위반하는 여정은, 당사자인 미카엘/로레가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카엘/로레를 자세히 알고 사랑하고자 하는 리사와 (그리고 엄마가 미카엘을 데려가지 못하게 끝까지 허리를 붙잡아주었던 잔과) 함께하는 것이 된다.


미카엘/로레가 그저 톰보이 여성인지, 부치 레즈비언인지, FtM 트랜스젠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건 그가 한참 정체성을 탐구하는 시기여서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게 그렇게 애매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아마가 그렇게 의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가 담고 있는 이 시기에 미카엘이 시도해보았던 것은 분명 트랜스젠더의 모험이었고 그로 인해 겪었던 고초 역시 트랜스젠더로서 겪는 피해였다. 그렇지만 트랜스젠더로서의 시도는 단지 생식기관을 A에서 B로 바꾸는 데에 국한되지 않으며,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인위적 구분을 빌미로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성역할과 섹슈얼리티와 몸의 총체적 구성을 전부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이기에,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다같이 미카엘의 고민에 함께하고 그를 응원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이 영화가 탈코 여성도, 레즈비언도, 트랜스젠더도 심지어 이성애 남성도 모두 함께 문제의식을 나눌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메인 포스터에 담긴 미카엘의 얼굴은 [타오르는 톰보이의 초상]이었음이 밝혀졌다....(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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