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리뷰
박윤진 감독의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 는 1999년에 ‘레벨이 없고 자유도가 높은 새로운 형식의 롤플레잉 게임’을 표방하며 출시되었으나, 얼마 못가 기억 에서 잊힌 채 서버만 근근이 유지되고 있는 이른바 “망겜” 〈일랜시아〉를 여직 하고 있는 유저들의 이야기이다. 관리 자나 업데이트도 없고 용량도 500MB밖에 되지 않는 저해 상도 RPG 게임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는 오프닝을 본 순간, 나는 이 영화가 서부극임을 직감했다. 서부극은 새로운 삶을 선사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황무지를 개척했지만 소소한 번영과 평화는 찰나로 끝나버리고 이제는 황량한 모래바람만 남은 상실의 마을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실은 강자의 서사이다. 강자만 이 자신의 상실을 서글퍼하며 그 상실을 이야기로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서부극은 퇴락해버린 꿈의 마을을 애도하며 시작하지만, 정작 그 땅에서 쫓겨난 미국 선주민들의 상실 은 서부극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21세기 한국 땅에서 상실은 오직 86세대 남자의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졌던 학창시절의 낭만, 내 집 마련의 성취, 가부장의 권위, 특히 진취적인 정치성이 사라진 사회를 애도했다. 그들에게 밀레니얼 세대는 (자기가 벌어다 준 돈으로) 모든 것을 갖추었으면서도 자신이 뭘 할 수 있고 뭘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응석받이일 뿐이었다. 밀레니얼에겐 애초에 뭘 상실하고 자시고 할 자격이 없었다.
그런 밀레니얼에게 게임 붐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세기 말에 개발되었다가 20년 가까이 방치된 망겜 〈일렌시아〉 는 완벽한 상실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만큼은 ‘네가 아쉬울 게 뭐 있다고’라고 윽박지르는 사람 없이 온전히 자신이 처음부터 개척해 온 마을의 주인으로서, 이곳에서 자신이 일군 것과 잃은 것에 대해 의젓하게 돌아볼 수 있다. 나는 넥슨이 야구팀 이름인 줄 알 정도로 온라인 게임에 문외한이었지만(야구에도 문외한이다), 이제 드디어 밀레니얼이 86의 등쌀에서 벗어나 자신의 상실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한껏 신이 났다.
영화는 유저들을 찾아다니며 ‘일랜시아를 왜 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한편, 〈일랜시아〉에 빠져들게 된 사회적 맥락으로 1997년 IMF 사태를 거듭 제시한다. 정작 사람들이 〈일랜시아〉를 즐기는 이유를 돌아보는 시점은 이미 2018년 전후인데, 왜 굳이 IMF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일까? IMF의 아픔이야말로 당시에 정리해고 당한 “불쌍한 아빠”들의 전유물 아닌가? 그 때 애들이 나이키 운동화 사달라고 떼쓰던 거 말고 한 게 뭐 있다고? 그 이유는 밀레니얼의 삶의 특성을 ‘번아웃’으로 규정하여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앤 헬렌 피터슨의 역작 《요즘 애들》(2021)에서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피터슨은 밀레니얼 세대는 일과 생활을 구분하지 않고 끊 임없이 일하며 여가 중에도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는 강박 에 시달리는 번아웃의 세대이며, 그렇게 번아웃에 내몰리 게 된 원인의 핵심에는 ‘불안정’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불안정’은 바로 미국의 노조가 붕괴하기 시작한 1980 년대에 위기를 겪은 부모 세대의 불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피터슨은 ‘밀레니얼은 좋은 시대에 태어나 고생을 싫어하는 응석받이다’라는 세대적 통념에도 도전하지만 동시에 ‘부모 세대(베이비부머 세대)는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성공할 수 있었던 호황기의 수혜자다’라는 통념에도 수정을 가한다. 1980년대에 노조 파괴와 복지 축소로 사회의 양극화와 고용 불안정이 심해졌는데, 그 불안을 겪은 부모 세대가 사회를 보다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불안정 속에서도 자기 자식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혹독하게 경쟁력을 무장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밀레니얼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소수의 전문직에 진입하지 않으면 삶이 무너진다’는 부모의 불안을 그대로 이어받아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 활동은 전부 가치 없다고 느끼는 강박적 삶을 살아왔고, 실제로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사회 속에서 대학과 직장 생활, 결혼 생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강박적 노력을 기본적인 삶의 태도로 삼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고 한다.
따라서 한국의 밀레니얼에게 IMF는 얼마든지 불안의 원형 적 기억이 될 수 있다. 그 공포를 자기 가족의 위기로 직접 경험했든, 이제 나라는 망했고 가장 노력한 극소수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무한 경쟁의 계시로 경험했든, 밀레니얼은 성공의 희망을 좇기보다는 파산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 끝 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아왔다. 실제로 IMF 를 계기 삼아 유연화에 박차를 가한 노동시장은 현장학습, 인턴, 수습, 파견, 특수고용 등 무수한 형태로 밀레니얼을 불안정 고용에 몰아넣었고, 이제 그들은 모바일 앱이 중개 하는 초단기 노동으로 학자금 대출과 비싼 월세를 메우고 친구들이랑 노는 순간마저도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수익을 노려보는 삶을 살아야 하게 되었다.
‘일랜시아를 왜 하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 너무 지쳐서 이 게임으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아무리 노력 해도 인정받지 못할 때 공을 들이면 들이는 대로 캐릭터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일랜시아〉에서 위안을 찾는 것이다. 쉴 새 없는 일정에 완전히 소진되어버린 사람도 〈일랜시 아〉로 돌아온다. 자유도가 높은 이 게임은 딱히 퀘스트 수 행에 매달리지 않고 하루 종일 채팅으로 노래나 부르다 가 도 상관없다. 그러면 또 다른 유저는 그의 노래를 한참 동 안 듣다 간다. 레벨 경쟁이나 유료 아이템에 휘둘리지 않는 형식이다 보니 유저끼리 장난치며 친해지거나 게임 그래픽을 관찰하며 예쁘다고 좋아할 여유도 있다. 게다가 게임회사가 관리를 하지 않으니 유저들이 매크로를 만들어 자동으로 광물을 캐거나 사냥을 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유저들은 ‘컴을 켜두기만 하면 캐릭터가 식물처럼 알아서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일랜 시아〉는 정말로 각박한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 편하게 놀 다갈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러나 그 안식처는 현실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곳이 아니 기도 했다. 이 극도로 불안정한 번아웃의 현실을 떠나 경쟁 도 없고 노동도 없는 낙원을 찾아왔지만, 그곳은 끝없이 쇠 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안락하게 휴식을 취하기 위 해서는 최소한 안정적인 접속 환경이 지원되어야 한다. 그 러나 게임 회사에서 관리를 중단해버린 〈일랜시아〉는 어떤 버그가 발생해도 고쳐지지 않았다. 관리자가 찾아와서 우리끼리 만들어 둔 매크로까지 못 쓰게 막아버리면 어쩌냐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일랜시아〉의 시스템 환경은 점점 더 나빠졌지만, 사람들은 어차피 도움을 요청해도 소용없고, 괜히 요청했다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면서 꾸역꾸역 버그를 참고 버텼다. 환경이 나빠질수록 영화의 질문은 ‘일랜시아 왜 하세요?’ 즉 ‘왜 일랜시아를 떠나지 않으세요?’에서 ‘일랜시아에서 우리는 무조건 참고만 살아야 하나요?’로 바뀌었다. 도탄에 빠진 이 마을에 드디어 정의의 총잡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 총잡이는 이름마저 ‘내언니전지현’이었다. (박윤진 감독의 게임 캐릭터 이름이다.)
박윤진 감독은 〈일랜시아〉 카페 게시판에서 ‘이제는 버그 에 적응해서 괜찮아졌다. 어찌어찌 피해 다니면 되더라.’는 글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뭐라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게임을 방치하는 상황에 대해 항의하고 싶기도 하지만, 〈일랜시아〉가 사실 괜찮은 게임이고 아직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넥슨에 다시 한 번 알리고 싶기도 하다며 고객 센터뿐 아니라 넥슨 노동조합에까지 찾아갔다. 그는 좋은 게임을 위해 좋은 회사가 되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결국 유저와 노조는 같은 편이라고 믿었다.
마침내 감독은 〈일랜시아〉를 만든 최초의 기획개발자를 만 나기에 이른다. 감독은 유저들이 사랑하는 〈일랜시아〉의 구석구석을 굿즈로 제작해서 그에게 선물했다. 하지만 그 개발자는 〈일랜시아〉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 게임을 개발하던 당시는 지금과 다르게 수익에 연연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환경이었고, 그래서 현실에서 누리기 힘든 자유를 게임으로 구현해보고 싶었다는 비전 정도를 어렴풋이 떠올릴 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일랜시아〉는 그것을 만든 부모 세대의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어떻게든 살고 있는 유저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서글프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들은 자기들끼리 요구안을 정리하고 영화를 제작하여 자신들의 게임을 세상에 알리면서 마침내 넥슨으로부터 공식 간담회와 대규모 업데이트를 성사시킨다.
《요즘 애들》의 저자 피터슨 역시 결국 번아웃의 지옥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이 상태에 저항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부모 세대는 자식들의 스펙을 더 빽빽이 채우면 이 불안에 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력서를 빽빽 이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한 이상 밀레니얼은 영원히 ‘한 줄 더 채울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자기를 해치거나, 퇴사하고 다시 자기 돈을 왕창 들여 충전한 뒤 애면글면 복귀하거나, 혹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탓하며 혐오세력이 되는 것이다. 피터슨은 어떻게든 자기가 더 노력하고 더 적응하면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잿더미에 불을 지르자고 간곡히 요청한다.
그렇기에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에서 ‘일랜시아’가 그 런 번아웃의 사람들이 지켜온 가상의 피난처인 동시에, 어 떻게든 직접 싸워서 지켜야 할 현실의 공간이 된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있는 줄도 몰랐던 몇 명의 고인물들이 20년 묵은 ‘망겜’의 업데이트를 한 번 얻어냈을 뿐인 이 사건이 그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왜 이토록 소중한 의미가 될 수 있는지 자연스럽게 들려준 감독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우리는 더 좋은 노동과 더 좋은 휴식을 요구할 수 있고, 얻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