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육의 경계를 넘는 대화의 가능성
레베카 스클루트의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을 읽으며 내가 가장 자주 떠올린 단어는 discipline 이다. 예전부터 나는 통상 체벌을 포함한 훈육으로 사용되는 이 단어가 ‘학문‘이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학문의 어떤 본질적 특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훈육이 바른 몸가짐과 규칙 및 명령에 맞게 행동하는 신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듯, 학문을 탐구한다는 것 역시 학문적 제도에 맞추어 신체를 능숙하게 통제할 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학문탐구란 선행연구를 검토하는 것, 발표하고 토론하고 반론을 반영하거나 재반론하는 것, 출처를 밝히는 것, 반드시 실험집단과 더불어 통제집단을 확보하는 것 등등이 모두 정해진 제도 내에서 학문적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몸에 익혀야 할 자세, 즉 어떤 정해진 형태의 몸의 움직임이다. 대학이라는 학교는 학생이 일반학문과 세부전공이 요구하는 질서에 따라 매끄럽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으로 훈육되었는지를 논문자격시험과 논문심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검사한 뒤 학위를 부여하여 인증한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적 현상을 야기한다. 첫째로 이 태도를 갖추기만 하면 실제 연구내용이 얼마나 편향적이거나 야만적이거나 망상적이든 학문적 엄밀성을 갖춘 것으로 인정된다는 점이다. 처음 발명된 사진 기술에 매료된 학자들이 허술한 실험을 하면서도 정확한 시간 간격으로 사진을 찍어 기록하면 과학적 엄밀성이 확보된다고 믿은 적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과학의 형식적 규율이 준수될수록 그 내용적 문제를 의심하기가 어려워진다.
둘째는 이 태도가 철저히 계급적이고 인종적이라는 것이다. 좁게는 정해진 대학에서 수련하지 않으면 학문적이라고 인정받을 만한 태도를 습득할 수 없고, 넓게는 백인중산층의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지 않으면 그 문화, 언어에 접할 기회가 없고, 결국 그것이 너무 이질적인 나머지 설령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 문화를 능숙하게 구사하기는커녕 견디기조차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개인의 능력과 무관한 부분이다.
책의 아주 첫머리에서 헬라 세포의 소식을 들은 그의 딸 데보라(및 그의 여러 가족)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고는 늘 생각했어요. 엄마 세포가 의학에 그렇게 많은 것을 해줬다는데 왜 우리 식구들은 병원에도 맘 놓고 갈 수가 없는가. 이해가 잘 되질 않는다니까요.” 나는 이것이야말로 헬라세포 사건에 담긴 진리를 추구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했고, 작가도 그래서 이 질문으로 이 책을 시작했다고 믿었다. (더 읽어보니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았다) 그들은 우리는 그걸 구경도 할 수 없다면, 당신들이 말한 그 “발전”이 진짜 발전이냐고 물었다. 이 질문을 더 밀고나가면 그렇게 해서 발전했다는 의학(혹은 과학)이 진정으로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무언가냐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본질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는 근대-백인-학문의 제도가 학문의 정당성과 엄밀성을 보장한다는 믿음을 잠시잠깐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지식이 실험 대상이나 실험 재료로 참여한 다양한 주체들의 공동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양심에 따라 생각하는 것은 과학 연구에 사용된 헨리에타의 세포의 자산적 가치를 보상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정도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눈에 헨리에타 가족은 끝까지 과학의 외부에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헬라세포가 과학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세포분열을 설명해줘도 듣지 않고, 이성이 손상되어 있으며, 어눌한 사투리를 쓰는 존재일 뿐이다.
(나는 이 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과학 전문기자라면서, 왜 페미니즘 비판과학은 구경도 못한 사람인 거 같은 거지? 심지어 의료실험에서 세포의 가치를 묻는 책을 쓰면서 과학의 진리는 과학자를 할 수 있었던 남자들만의 실험노동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진리 탐구의 제도를 완성시킨 실험실 노동자의 육체노동과 그 실험대상이었던 실험쥐의 신체적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해러웨이의 <겸손한 목격자>(1996) 등등의 책을 조금도 읽지 않은 것처럼 이래도 되는 건가…???????)
그렇기에 이 책은 내용적으로 헬라세포가 던지는 과학에 대한 질문에 대한 탐구가 중도에서 멈추는 것뿐만 아니라 서술적으로 데보라를 대상화하고 착취하고 있다는 혐의를 면치못한다. 데보라는 헬라세포의 근원인 헨리에타 랙스는 누구이며, 그의 존재가치를 인정한다면 소유지분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를 밝히려는 자신의 프로젝트에 반드시 필요한 대상이지만, 결코 동반자는 되지 않는다. 과학 제도의 기준을 의심하지 않는 이상, 데보라를 비롯힌 그의 가족은 그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헬라세포의 과학적 업적’을 기리는 자리에서 발언하기 전에 문장을 정확히 끝맺으라는 주의를 들어야 하고, 결국 말을 잘 못해서 미안하다며 자신의 미달함을 미리 사과해야 하는 처지에 몰릴 수밖에 없으며, 그에 대해 작가도 부당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과학을 위해 던진 질문은 접수되지 않고, 그들의 참여는 영문도 모른 채 어쩌다 하게 된 몸빵일 뿐이다. 과학을 정립하는 것도, 그 몸빵의 과학적 가치를 정의해주는 것도, 과정 중에 발생한 오류에 대해 반성하는 것도 전부 오롯이 기존의 과학자들끼리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헨리에타와 그의 가족들은 과학 발전에 참여한 주체일 뿐 아니라 과학에 대한 욕망을 가진 주체이다. 백인 사회에서 소외되어 살아온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작가의 취재에 협조한 이유는 그들도 “(소위) 인류를 위해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그 과학제도의 일원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헨리에타의 과학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고 싶다며 다가온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이후로, 그들은 당장의 금전적 대가보다 과학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원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발전이라는 것에 자신들의 기여가 계속 이어지기를 원한다. 이것은 과학-근대를 살아가는 동시대 동사회인으로서 헨리에타 가족과 과학자집단이 동등하게 공유하고 있는 욕망이다.
그러나 과학에 연루되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과 시도는 간과되고 작가는 끝내 그들을 과학주체로서 인정하지 못한다. 책의 마지막에 배치한 가족들의 후일담은 그들에 대한 작가나름의 애틋한 애착이 느껴짐과 동시에 끝까지 작가는 이들을 이런… 무뢰한에 머무르게 하는구나 하는 좌절감을 느껴지게 할 뿐이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출간되고 위안부 당사자들이 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에 대해, 학문의 자유로운 추구를 무조건 법적 규제의 힘으로 막으려 하는 건 옳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고, 실제로 법적으로도 학문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무죄판결이 났다. 하지만 어느 위안부 운동가는 당시 사건에 대해 위안부 당사자들이 “학문적 문법”에 맞게 논쟁하고 비판할 기술을 당장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그나마 제도에 합당하게 낼 수 있는 방법은 변호사를 통해 소송을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얘기했었다. 나는 헨리에타 가족도 좀 더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사태를 피악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나는 중요하고 복잡한 사건일수록 한 사람의 완벽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불완전한 이야기가 여러 방식으로 더해지거 겹쳐져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지금도 계속 헬라세포의 이야기가 다양한 관점으로 또 써지고 또 써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