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잃은 자들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웃
켄로치 감독의 <나의 올드오크> 봤다. 잔잔한 얘기일 줄 알고 마음 편히 갔다가 엄청 울었다... 과거에 처절히 투쟁하다 꺾이고 흩어진 사람들이 또 다른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투쟁의 힘을 다시 한 번 불끈 꺼내들 때 나는 너무 눈물이 난다. 어쩌면 뼈아픈 실패였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삶이 현재에 다시 연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될 때.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선주민 공동체가 이주민+협력자 공동체에 여러 가지 혐오범죄를 저지르는데 그에 대해 잘잘못을 가리는 장면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가령 한 시리아 학생이 학교에서 심하게 집단폭력을 당해도, 영화가 직접적으로 가해자들을 비판하거나 사과하게 만들지 않고 흐지부지 넘어간다. 이렇게 대부분의 가해들이 흐지부지 지나가버린다.
그렇다고 영화가 그런 가해들은 별로 대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는 아마도 상당히 의도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 혐오범죄들은 심각한 폭력이자 사회적 해악이지만, 그렇다고 가해자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피해자의 무고함을 일일이 증명하는 데 온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가해자들은 그저 사건 이후에 은근슬쩍 영화에서 쫓겨난다. 인물의 퇴장에 대한 설명조차 없이 정말 그냥 관심 밖으로 사라져버린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런 혐오범죄가 남긴 상처를 어떻게 위로하고 극복해야 하나에 대한 문제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사과하는 가해자는 쫓겨나지 않고 살아남는다.) 영화는 현재 벌어지는 혐오뿐 아니라 끊임없이 좌절해야 했던 인물의 과거나, 어설피 가지게 된 미래에 대한 희망 등등 그 모든 것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 TJ와 야라의 모습을 아주 솔직하게 보여준다.
사회가 좋아질 거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영화는 이제 남은 방법이라곤 1) 죽거나 2) 옆에서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끼리 서로 기대고 뭉치며 서로가 서로의 살 길이 되어주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만일 내가 더 힘드네 니가 내껄 뺏어갔네 하면서 서로 물어뜯는다면 결국 자의로든 타의로든 1)로 수렴하게 되는데, 1)의 가장 사회적인 형태가 바로 전쟁이라는 점에서 1)은 결코 수사적인 위협이 아니며 당장 내 밥그릇이라도 챙겨주긴커녕 문제를 걷잡을 수 없이 악화시키는 선택이 된다.
그래서 <나의 올드오크>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는 말을 여러 번 강조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화에서 정말로 다같이 밥을 먹으며 연대감을 키워가는 순간은 정말 찰나였다. 물론 그 식사는 연대를 키우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기초적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지탱한다는 느낌이었다. 켄 로치의 인물들이 삶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가졌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나의 올드오크>의 TJ와 야라는 죽음에 가까이 가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비참한 상황을 돌아보며 “차라리 죽으면 편해질 거 같다”라고 진심으로 말한다. 그들은 정말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죽을 것만 같다.
차라리 죽어서 편해지고 싶은 그들을(특히 TJ) 어떻게든 살려놓는 것이 그 공동식사다. 그들은 희망을 가지면,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하면, 고통스럽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하지만 약육강식이라는 둥 내코가 석자라는 둥 하면서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이를 적으로 돌리는 순간, 고통이 줄지는 않으면서 고립만 심해지는 역효과가 초래될 뿐이다. 그들은 내 고통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악다구니를 퍼붓지만, 그 고통을 알아줄 사람을 걷어차고 내쫓은 것은 본인 자신이다.
그에 반해 좌절하고 상실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주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려고 했던 사람들은 결국 자신을 이해해주고 지켜줄 사람들을 얻는다. 그리고 그들에 기대어 목숨을 부지한다. 수시로 포기하고 싶지만, 어떻게든 용기를 내서 그렇게 살기로 하고 그렇게 살자고 서로를 독려한다.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객관적으로는 비극적인 결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결국 또 하나의 죽음이 찾아왔다. 정말 남은 거라곤 단 하나. 그 죽음을 함께 애도하기 위해 모여준 사람들뿐이었다. 사람들이 자꾸 찾아올수록 나는 계속 눈물이 났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카드를 써왔다는 게 너무 서글펐다. 가끔 아주 형식적인 관례가 오히려 진심을 전하는 좋은 수단이 되어줄 때가 있는데, 이 영화의 그 장면이 그랬다. 왜냐면 그게 관례인지 모를 수도 있는 이민자에게조차 최대한 정식으로 예를 표하고 싶었던 마을 사람들의 진심어린 성의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섣불리 현실을 낙관하며 순간적으로 관객의 기분을 풀어주려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젠 아무 방법이 없다고 무책임하게 비관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며, 얻어낼 수 있는 건 무엇인지를 최선을 다해 찾아보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나의 올드오크>를 본 영화관에서는 상영을 시작하기 전에 켄 로치 감독이 새해인사와 함께 영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설명해주는 영상이 나왔는데, 그것이 너무 신기한 나머지 2024년에 극장에서 켄 로치의 신작(아마도 은퇴작)을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제가 아닌 일반 극장 상영에서 감독이 관객에게 자기 영화의 주제를 먼저 말로 설명하는 일은 아무래도 드문 일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 뭐지…??? 난 이제 저 감독의 지침에 따라 영화를 봐야 하는 건가…? 이렇게 막 개입해도 되는 거…?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지금까지 켄로치 감독이 영화를 만들고 또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봐오면서 쌓아온 관계가 이만큼이나 되는 거구나, 하고 납득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켄 로치 감독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온다는 것은, 그가 만든 어떤 다층적이고 시대적인 영상텍스트를 감상하러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켄 로치 감독이라는 오래 함께해 온 친애하는 사람을 만나러 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기꺼이, 혹은 매우 반갑게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