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펙트 데이즈
비행기에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 스크린은 좀 작을지라도 일상의 방해 요소 없이 영화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늘 위 영화관 같달까.
최근 여행길에는 <퍼펙트 데이즈>를 봤다. 여느 영화처럼 화려한 총격 씬도 격정적인 로맨스도 없었지만 적당히 슴슴하고 담백한 게 아, 딱 일본 영화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메라는 스크린 타임 내내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의 하루를 충실히 따라갈 뿐이다.
그의 일상은 정교하게 짜여 있다. 매일 아침 미화원의 비질 소리로 눈을 뜨고, 양치질하고 분재에 물을 주고 파란색 작업복을 걸치면 출근 준비 완료다. 심지어 소지품에도 순서가 매겨져 있다. 집을 떠날 때는 왼쪽부터 지갑, 카메라, 열쇠, 시계, 동전을 챙기고 집에 돌아와서는 역순으로 꺼내 놓는 식이다. 이후 일을 하고 퇴근하고 잠자리에 들기까지도 마치 반복 재생을 눌러 놓은 사람처럼 행동한다.
초반에는 이런 나날 속에 소소한 행복이 있다는 내용인 줄 알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화장실 청소부일지라도 그의 일상은 '퍼펙트'하다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어쩌면 그가 불행할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겹치면서 의문이 들었다.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평온하게 흘러갈 뿐인 이 삶이 정말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가?
영화 속에서 히라야마는 선택을 유예하고 현실에 안주한 것에 대한 기회비용을 치르는 것 같다. 오랜 세월에 무뎌졌지만 내가 지나온 길에 무수히 많은 '다음'의 분기점이 있었음을, 불현듯 깨달아 고통스러워진 것이다. 잔잔한 그에게 돌을 던진 사람은 조카 니코와 단골 술집 사장의 전남편, 토모야마다.
니코는 삼촌과 자전거를 타다가 강 너머 바다가 궁금해진다. 이어 지금 바로 가보자고 하지만, 히라야마는 "콘도와 콘도, 이마와 이마(나중은 나중, 지금은 지금)"라며 단념시킨다. 이어 니코를 집으로 돌려보내려 할 때도 가기 싫다는 그녀를 "다음에 또 오면 되지"라는 말로 타이른다. 하지만 여동생과 조우하면서 과거 모종의 이유로 가족과 연을 끊고 살아왔음이 비춰지고,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를 한 번 찾아뵈라는 말에도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가지 않을 것을 알기에, 늘 약속해 왔던 '다음'을 쉽사리 말할 수 없었고, 그 말이 공허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장면에서, 히라야마는 주말 루틴을 따라 단골 술집에 갔다가 사장이 전남편과 재회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는 암이 재발하여 전 아내를 찾아온 것이었다. 지나온 인생을 푸념하는 토모야마 앞에서 히라야마는 도리어 "변하지 않는 건 말도 안 된다"며 소리친다. 그림자가 겹쳐지면 더 진해지는지 궁금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토모야마에게 그러면 지금 바로 해보면 된다며 그림자놀이를 벌이기도 한다.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토모야마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유예하는 것에도 언젠가 끝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히라야마 내면의 갈등은 마지막 장면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출근길에 올라 테이프를 튼다. <Feeling Good>이 흘러나오며 니나 시몬은 오늘 하루와 이 삶의 찬란함을 노래하지만, 그의 표정은 웃는 듯 우는 듯 오묘하기만 하다.
사실 그의 표정을 보며 좀 헷갈리기도 했다. 지금 슬픈 게 맞는 건가? 아닌가? 불행하다고 딱 잘라 말하기엔 그의 삶도 분명 충만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남긴 틱택토 종이를 버리지 않고 정성스레 응답하는 모습, 일과를 마치고 개운한 몸으로 생맥주를 마실 때의 후련함. 그런 것들은 분명 행복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 쿠키 영상에 등장하는 "코모레비(木漏れ日)"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코모레비는 빛과 그림자가 빚어내는 장면이다.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마치 인생의 비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일상도 행복과 불행의 명암이 어우러져 완성되는 것이라고, 그러니 삶이란 원래 완벽하게 불완전한 것이라고. 결국 히라야마의 일상에 생긴 균열마저도 '퍼펙트' 한 셈이다.
대신 코모레비는 찰나의 순간에 단 한 번만 존재한다. 이 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두 눈 크게 뜨고 잘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 앞에서 눈을 감고 외면하기로 했다면, 그 선택에 대한 대가는 오롯이 나의 몫이다.
짧은 비행이었던지라 영화가 끝나자 어느새 착륙할 시간이 되었다. 벌써 다 왔나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떠난 것은 어디로든 도착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출발이 있으면 도착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듯이, 모든 것이 균형을 맞추어 내 삶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간단한 진리를 왜 잊고 있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길에 함께 하여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