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팥빵과 까눌레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게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꾸밈과 허구의 영역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김연수 작가님의 글을 만나고는 생각을 바꿨다. 내게 없는 것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나에게는 텅 빈 부분이 있노라고, 구멍이 있는 그 상태가 바로 나라고 인정하는 담담한 태도라면.
내 마음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 텅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다.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빠져들었고 아파야만 한다면 기꺼이 아파했으며 이 생에서 다 배우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텅 빈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그건 슬픈 말이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면서 나는 내가 도넛과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됐다. 빵집 아들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도넛으로 태어났다. 그 가운데가 채워지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불교에서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와 '없음이 있는 상태'는 다르다고 말한다. 얼핏 말장난 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어둠은 그저 까맣기만 한 허공이 아니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로써 존재한다. 빛이 있으면 더 이상 어둠이 아니고, 도넛의 가운데가 메꿔지면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하듯, 어떤 것은 역설적이게도 부재不在가 있어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니 '없는 것'도 '부족한 것'도 사물의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러고 보면 보석도 내포물과 스크래치 때문에 등급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등급이란 외부에서 정한 기준일 뿐 그 흠집이 고유한 특성이 되기도 한다.
나도 수없이 많은 '없는 것'과 '부족한 것'의 산물이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이 이렇게 저렇게 달라졌으면, 하고 바라지는 않는다. 그것은 구멍을 부정하면 반지일 수 없는 금반지의 운명과도 같다. ( 아래 구절은 김현경 작가님의 『사람, 장소, 환대』를 읽다가 메모한 것이다.)
금반지에는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은 금과 마찬가지로 금반지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금이 없다면 구멍 (그렇다면 구멍은 아예 존재할 수도 없으리라)은 반지가 아니다. 그러나 구멍이 없다면 금(금은 구멍이 없더라도 존재한다) 또한 반지가 아니다. (···) 구멍이란 그 구멍을 둘러싸고 있는 금에 힘입어서만 (어떤 부재의 현전으로서) 존재하는 무無이다. (알렉상드르 꼬제브,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헌영 옮김. 한벗, 1981. p. 237)
다시 김연수 작가님의 빵 얘기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나는 어떤 빵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흠....... 아무래도 지나치게 높은 온도에서 구운 탓에 겉은 바싹 타버려 까맣고 딱딱하지만 속살은 여전히 샛노랗고 몰랑한 까눌레쯤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을 되돌려 적당한 온도에서 반죽을 구워낼 기회가 생긴다 해도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