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면의 잔상이 길게 남는 영화를 좋아한다. 처음이 또렷하면 한참 시간이 지나도 영화에 대한 느낌을 비교적 세세히 기억할 수 있다. 고급 맨션의 침실, 창밖은 아직 푸른 빛이 살아나기 직전의 새벽 도시 풍경이다. 나지막하고 건조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채 천천히 책을 읽는 듯한, 소통을 위한 언어라기 보단 종교적 강독이나 독백에 가까운 읆조림. 목소리 주인공이 화면 속 인물인지 실재하지 않는 존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다. 화면 속 침실은 익숙하게 알고 있던 현실의 공간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다른 세계의 현실처럼 느껴졌다.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아티스트의 역량을 알게 해준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 말을 하고 있지만 누구에겐 잘 들리지 않고, 대화인 줄 기억했지만 누구에겐 독백이었던 어긋난 소통에 대한 자기 고백 같은 영화다.
모든 관계란 결국 상실로 귀결된다. 우리는 안다. 처음 시작할 때 영원할 것 같던 누군가도 지나고 보면 한때의 인연이라는 걸. 시간이 흘러 관계의 밀도가 느슨해지고 신선했던 감정들이 하나둘 권태라는 그늘에 가리게 되면 상대의 눈빛이, 음성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알아 차린다. 이미 잘 알고 있듯 그 경험은 늘 충격적이다. 이력이 쌓인다고 쉬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새로운 상실의 시작은 누구에게든 언제나 어렵고 고단한 일이다.
물건도 사람도 기억도 욕망도, 늘 좋을 것 같던 그 무엇도 처음의 마음처럼 오래 가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을 향해 간다. 마음은 모든 새 것을 순식간에 헌 것으로 만든다. 끝에 남는 건 당신과 나, 그 사이를 오갔던 소통의 흔적 뿐이다. 그나마 마음이 각색한 언어, 문자, 소리의 흔적들은 적당히 조작되고 완화된 까닭에 상실감은 조절되고 현실은 그럭저럭 견딜만한 과제가 된다. 가령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과 아닌 것을 가리고, 슬픔과 기쁨의 회환도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만.
한때 믿었던 사이였지만 관계에 균열이 시작되면 마음은 서둘러 상실을 받아들일 채비에 들어간다. 마음이 먼저 끝나버린다. 한번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사람, 시간, 공간은 그대로다. 마음만 먼저 떠나가니, 불안과 슬픔은 일찍 증폭되어 쉽게 멈추지 않는 강한 관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 관성이 사람을 옭아맨다.
주인공 가후쿠의 죽은 아내 이름이 왜 ‘오토’ 였는지 아내 이름과 영화 제목의 마이 카(my car)가 언어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건 영화 중반부를 지날 무렵이었다. 죽은 아내 목소리를 매일 차 안에서 듣는 남자에게 19년 된 빨간색 사브는 여전히 그의 삶을 지배하는 아내의 정령(精靈)이었다.
하지만 영화 엔딩 장면에서 남자의 빨간색 사브는 운전을 맡았던 미사키의 차가 된다. 미사키가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빨간색 사브를 타고 도로를 내달리며 영화는 끝난다. 아름다운 해피 엔딩이었다. 아마 가후쿠는 마침내 상처를 떨쳐 내고 자신의 삶을 ‘드라이브 마이 카(drive my car)’ 하기 위해 헌 차를 버리고 새 차를 마련했을 것이다. 물론 남자의 새 자동차가 나오는 뻔한 장면은 영화엔 등장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삶이란 각자의 이야기를 쓰고 그것을 한 페이지씩 넘기며 읽고 복기하며 한발씩 나아가는 순례의 과정일지 모른다. 그 과정 사이 사이에 타인의 이야기가 접속되어 더러는 합쳐지고 더러는 겉돌다 떠나가며 이야기들로 채워진 하나의 세계가 구축되어간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 그 좁은 현실이 전부인 우리에게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는 작은 교훈 하나를 가르쳐주었다. 지나간 사람, 지나간 시간과 공간에 머물며 후회하는 일은 두말없이 미련한 짓이겠지만 가끔 어떤 경우엔 그런 미련함을 거쳐야 삶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게 된다는 교훈. 그런 페이지는 접어두고 페이지 속에 머무는 일을 기꺼이 감내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 영화가 내게 건넨 메시지다.
사실 살다 보면 대충 넘겨도 되는 페이지가 있고 쉽게 넘길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 섣불리 넘기지 말고 잠시 그 안에 머물러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 그것은 쉽게 새것이 헌 것이 되는 삶 속에서 충만함을 더 길게 간직하는 기회가 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며, 조금은 연민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여유를 부여하기도 한다.
영화의 후반부, <바냐 아저씨> 연극공연에서 소냐 역을 맡은 장애인 유나는 바냐역을 맡은 가후쿠를 뒤에서 안은 채 수어로 천천히 말했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유나의 움직이는 손을 진지하게 바라보던 가후쿠의 깊은 눈빛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