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소장 Aug 03. 2022

바우지움

건축리뷰


양양 해변의 건축 프로젝트를 위해 오가던 출장길에 빗길 귀경을 피하려 우연히 미시령 방향으로 길을 틀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참 세월이 더 지난 후 만났을 장소가 하나 있다. 강원도 고성군 원암리 마을에 있는 특이한 미술관. 돌과 물, 풀, 설악산의 풍광으로 풍요로운 바우지움(BAUZIUM)이다. 돌을 칭하는 강원도 사투리 ‘바우’와 미술관의 ‘지움’을 합한 말이다. 즉 ‘돌’ 박물관이란 의미다. 땅 어딘가에 집을 세우고 나머지는 마당이나 뜰 같은 빈터로 남기는 게 일반적 건축 접근법이라면 바우지움은 외부의 빈터를 먼저 정교하게 구획하고 그 중 필요한 만큼만 지붕을 덮어 실내공간을 만들었다. 내부보다 외부가 더 중요했을 미술관이다. 공간의 중요도를 굳이 따지자면 외부공간에 방점이 찍히는 건축이다.


큰 공간들을 구획하는 콘크리트 벽 외에 내부공간을 갖는 벽들은 대부분 유리벽을 세워 안과 밖을 나누었다. 그러다보니 실내에서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하다. 밖을 보기 위한 안, 안을 보기 위한 밖이랄까. 미술관 안, 밖의 모든 사물과 공간의 관계는 동등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마주보게 설계되어있다. 돌이 중심이다. 사람과 돌, 돌과 물, 돌과 바람, 돌과 풍경.... 그리고 사람. 의외에 경이로운 우주적 체험이 잠복되어있는 외부공간을 거쳐 들어온 실내공간엔 소박하게 진열된 조각품들이 있다. 바우지움의 조각품은 얼핏 외부 공간의 힘과 존재감에 눌려 관람자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묵하게 강한 힘을 내재하고 있는 외부공간의 흥분이 내부공간으로 들어오면서 소박한 조각품을 통해 다시 감정을 가다듬게 되는 감동의 순화 과정이 이 곳엔 있다. 역시 건축가의 의도가 아니고선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미시령 터널이 생기기 전부터 이곳을 오갔던 건축주는 설악산의 신성한 분위기와 풍경이 들여다보이는 원암리가 좋았다고 한다. 울산바위가 보이고 소나무 숲 많은 동네 근처에 십 수 년전 작은 집을 얻어 주말주택으로 사용하다 조각 작품을 위한 전용 미술관을 지었다. 바우지움은 원래 있던 땅의 풍토에 거스르지 않게 계획되었다. 설악산 울산바위를 넘어온 높새바람이 통과하고,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지나는 지점에 미술관이 있다. 건축가는 이 곳에 콘크리트에 돌을 섞어 조직한 특별한 질감의 벽을 세워 조각 전시공간과 돌을 만날 수 있는 외부공간, 그 둘을 이어주는 산책로를 만들었다. 유리로 된 전시장 벽이 외부와 내부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으면서 바깥 환경과 내부 환경은 언제나 하나로 존재한다. 땅 크기가 3천평에 육박하는 광할한 장소인데 실제 점유하는 실내공간은 전시공간과 까페, 작업실, 세미나실 등을 다 합쳐도 300평 남짓이다.


첫 번째 전시실 큰 유리창 바깥에 조성한 거울 같은 수면은 꿈틀거리는 돌의 운동성을 다독거려 자칫 들뜨기 쉬운 미술관의 분위기를 조용한 사색의 장소로 조율한다. 비오는 평일이라 아무도 없는 미술관은 지구밖 우주의 진공상태처럼 고즈넉했다. 수면 너머로 걸어가 듬성듬성 놓인 돌무더기를 한참 바라보았다. 보슬비가 내리다가 잠시 멈췄다가를 반복하는 날씨 속에 주변은 침묵으로 잦아들고 듣기 좋은 빗소리만 소근거렸다. 그 소리가 마치 돌이 건네는 언어처럼 들려와서 자연스럽게 돌에 손바닥을 대어 느껴보았다. 축축한 동물의 피부처럼 기묘한 생기가 전해져왔다.


건축가는 큰 땅을 세 개의 구역으로 조직한 후 각각 물, 돌, 풀을 테마로 특색있는 정원을 조성했다. 원암리(元巖里)의 토양은 대부분이 바위와 돌이다. 지반공사를 위해 흙을 파내자 곧 엄청난 바위와 돌들이 계속 나왔다고 한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 지반공사 후 계획이 변경된 건지는 명확치 않지만 토양이 내어준 돌들을 버리지 않고 미술관의 주제로 삼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추가적으로 대관령 터널 공사에서 공수한 예쁜 쇄석들이 정원 곳곳에 깔렸다. 남은 돌들을 깨어 담을 세우는 콘크리트 공사 때 섞어 넣어 돌 벽인지 콘크리트 벽인지 경계가 모호한 독창적 질감을 만들어냈다. 수 만년 동안 지역의 토양 속에서 살아왔을 돌들이 마침내 깨어나 현재의 콘크리트와 섞여 들러붙어 낯선 풍경이 되었다. 돌이 지나온 영겁의 시간이 건축을 매개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바우지움은 돌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자연사 박물관이 된다.     


바우지움의 공간은 영화 원더스트럭(wonderstruck)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1927년을 사는 귀머거리 소녀와, 1977년을 귀머거리 소년이 뉴욕 자연사 박물관의 운석을 손으로 만지는 장면이다. 광활한 우주처럼 이방인에게 낯섦 가득한 뉴욕에서 50년 시간의 한계를 초월한 두 사람이 우주적 인연으로 조우하는 멋진 장면이다. 듣지 못해도, 말을 못해도 서로를 자연스레 이해하고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살다보면 종종 있다. 우주라는 큰 공간 속에 나와 네가 함께 존재하고 있슴을 느끼는 경이로운 순간(wonderstruck)이다. 우주를 통과해 수 만년을 날아왔을 영화 속 운석은 두 주인공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차이를 찰나의 순간으로 만들고 두 손을 이어준다. 삶은 고요 속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법. 영화 속 운석처럼 바우지움의 돌들 역시 미술관을 찾은 이들에게 시간에 대해, 인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바우지움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곳이다. 현실에서 반걸음 비켜난 시선이 되어 놓치고 있던 것을 하나씩 주워 담게 한다. 누구든 이 곳에선 자신의 삶이 비루한 일상이 아닌 하나의 역사란 걸 알게 된다. 살아있는 시간의 박물관이란 걸 이해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뮤지엄 산, 걸어도 걸어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