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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장 Aug 03. 2022

뮤지엄 산, 걸어도 걸어도

건축리뷰

 

혹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8년 작 <걸어도 걸어도>를 아시는지. 영화는 가족의 죽음을 통해 그 상실감을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치유하고 안고 살아가는지 세심하게 그려낸다. 해가 지고 바뀌는 것을 하나가 끝나고 하나가 새로 시작 되는 개념이 아닌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이치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우리의 죽음과 삶이 서로 다르지 않음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걸어도 걸어도>는 새로운 마음을 먹되 들뜨지 않고 뭔가를 시작해야 할 때면 언제나 생각나는 영화다.


삶과 죽음은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 항상 가까이 있고 서로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명료한 진실을 잔잔한 영화를 통해 되새겨볼 수 있으니까. 특별할게 없는 어떤 가족의 일상이 세밀하게 묘사되고 평범한 일과 속에 사람들의 상처와 외로움, 삶에 대한 잠재된 의지가 드러난다. 특히 영화의 인트로는 평범한 단독 주택가의 아침 풍경 속에 어딘가로 천천히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인상적인데, ‘걸어도 걸어도’라는 제목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이해해볼 수 있는 장면이다. 산다는 것의 의미, 삶의 여정을 ‘걸어도 걸어도’ 내가 원하는 결과가 있을리 없는 수많은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해 바뀌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은 나이가 되었다. 한 살 더 먹는 노쇠에 대한 두려움보단 당장 또 걸어가야 할 닥친 1년의 현실이 버겁고 지레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어른들 말씀으론 나이 서른, 마흔, 쉰, 예순으로 넘어 갈수록 삶은 더 진득해지고 지혜로워져야 맞는 노릇일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점점 더 알 수 없어지는 ‘인생’의 체념만 깊어진다. 그리고 다시 1월이 되었다. 그래서 한해가 바뀌고 시작되는 즈음엔 앞으로 벌어질 한해의 희로애락을 가늠하며 가급적 마음을 차분히 유지하려 신경 쓰게 된다. 뻔한 얘기지만 잔잔한 음악과 차분하고 사색적인 영화, 달리기보단 걷기, 말수 줄이고 관조하기, 행동은 느릿느릿, 마침 춥고 황량한 날씨가 이런 태도를 유지하기엔 좋다. 조증의 활력남에게도 육체적 움직임 보단 정적인 사색이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1월이다. 계절을 받아들이며 한번쯤은 걸어도, 걸어도, 결과 따위 중요하지 않은 막막한 시간을 잠시나마 누려 보는 건 어떨까.


그리 깊지도 얕지도 않은 산들 주변에 뮤지엄 산(Space Art Nature)이 있다. 노출 콘크리트의 대가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76)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단순히 노출콘크리트라는 통속적 수사로 한정하기엔 이면의 풍성한 이야기가 많은 건축이다. 뮤지엄의 시작점은 주차장과 연결된 웰컴 센터고, 반환점은 독보적인 빛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의 전용 미술관이다. 시작점과 반환점 사이는 특징적인 몇 개의 가든과 실내 전시공간, 산책로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전시관처럼 한정된 틀 속에서 누군가 정해놓은 동선으로 시작점과 끝점으로 움직이는 공간이 아닌 것이다. 한적한 평일, 더욱이 한겨울이라면 반환점까지 700미터에 달하는 기묘한 산책을 오롯이 혼자 누릴 수도 있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독학으로 건축에 입문,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고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대학 근처도 안간 사람이 건축가가 된 것도 대단하지만 동경대, 예일대, 하버드대 교수를 역임하고 여든이 코앞인 나이에도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는 이력은 다소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안도 다다오 건축의 특징을 요약하면 재료의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 재료에 적절한 빛과 어둠을 드리우는 것, 마지막으로 그런 공간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어떤 예술적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뮤지엄 산은 그런 의미에서 안도 다다오 건축의 모든 것을 집약시킨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더 궁금하다면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몇 개의 인상적인 그의 작품들을 보러 가는 것도 재밌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제주 섭지코지의 지니어스 로사이나 한시간 거리의 나오시마 지중미술관까지 둘러본다면 안도 다다오의 매력이 뭔지 더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


뮤지엄 산에서도 그는 관람자와 자연을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게 하고 빛과 어둠을 세심하게 조절하면서, 고요와 명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에 심취해있다. 그리고 그런 공간들을 이어붙인 근사한 산책의 여정을 하나의 건축으로 완성시켰다.


주차장과 연결된 웰컴 센터는 메인 드라마의 에피타이저다. 원형으로 휘어진 벽을 따라 천정에서 쏟아지는 빛, 가공되지 않은 자연미의 석축 벽, 구조를 지탱하는 노출콘크리트가 부담스럽지 않은 비율로 버무려져 산책자를 맞이한다. 센터를 벗어나 뮤지엄의 입구로 걸어가는 300여 미터의 여정은 얕고 넓게 펼쳐진 패랭이꽃 밭과 위로 높이 솟은 백색 자작나무 숲인데 서로 극단적 대비를 이루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풍경의 이색적인 배치다. 낮게 드리운 꽃밭을 보다가 높은 자작나무 숲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계절에 따라 기묘한 풍경으로 산책자를 맞는다.


자작나무 숲과 산책로의 가벽 뒤엔 워터 가든이 숨어있다. 예술 산책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 뮤지엄 건물을 물 위에 띄운 배처럼 보이게 하는 수공간은 주변 자연의 풍경과 계절의 색채까지 정직하게 담아내는 거대한 바닥 거울이다. 만약 혼자 워터 가든을 걷게된다면 잠시 눈을 감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다. 사각 거리는 나무소리, 수면 위를 스치는 바람소리, 알 수 없는 편안한 백색소음들이 지친 머리를 상쾌하게 해줄 것이다. 일상과 단절된 조금 다른 세계에 들어왔음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안도 다다오는 어떤 프로젝트에서든 지역의 토속 재료와 특유의 노출 콘크리트를 기반으로 사각형, 삼각형의 기본 기하학 조형을 조합하여 독창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워터 가든에 깔린 돌은 서산의 해미석이다. 뮤지엄 본관은 노출 콘크리트를 내부로 넣고 외벽은 갈색의 파주석을 사용했다. 서로 다른 질감이 어우러진 틈새를 통해 건물로 진입하면 뮤지엄 본관은 여러 개의 덩어리가 사각, 삼각, 원형의 공간으로 이어지며 연결되어있다. 먼저 뮤지엄 입구 왼편엔 상설 페이퍼 갤러리가 있다. 한솔그룹의 주력 상품인 종이를 기념하는 국내 최초의 종이 박물관이다. 페이퍼 갤러리엔 종이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고대 파피루스부터 성경, 코란 등 종이 유물과 인쇄술과 얽힌 각종 보물과 문화재가 있다. 페이퍼 갤러리 지나면 삼각형으로 뚫린 하늘을 볼 수 있는 돌 무더기 마당이 있다. 이 공간은 뮤지엄의 중간에서 앞과 뒤를 연결하며 산책자들이 잠시 한숨을 돌리게 하는 공간이다. 땅과 하늘, 돌과 콘크리트, 사람을 동시에 연결해 주는 여백의 공간으로 건축가의 의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눈 오는 날 삼각형 돌 마당에서 하늘을 보면 건축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어둑한 복도와 벽이 미로처럼 얽힌 기획전시장과 본관을 빠져나오면 신라고분을 모티브로 한 스톤 가든을 만나게 된다. 뮤지엄 내부 산책이 직선적인 동선의 엇갈림으로 피로감을 느꼈던 산책자들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을 만나러 가는 사이에 배치된 부드러운 돌 둔덕들을 지나면서 굳었던 마음이 풀어진다. 스톤 가든의 끝엔 뮤지엄 산의 반환점인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관이 있다. 이 공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상엔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제임스 터렐은 자신만의 공간과 빛을 만들어낸다. 공간과 빛은 체험의 대상이다. 글로 공간의 구체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건 쉽지 않다.


그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바닥과 벽의 구분이 없다. 벽과 천정의 구분도 없다. 안과 밖의구분도 어둠과 빛의 구분도 없다. 현실에 존재하지만 한편으론 존재하지 않았던 이상한 공간. 제임스 터렐을 만나기 위해 나오시마의 지중미술관과 <달의 이면>을 다녀오신 분들이 꽤 있을 것이다. 제임스 터렐을 경험하고 나면 빛과 공간,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해왔던 현실 세계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른다.

반환점에서 다시 스톤 가든으로 올라오면 이제껏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 여러 번 왔던 산책자라면 시작과 끝이 모호한 도돌이표 같은 산책로임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초행길이라면 여기서부턴 영화 <걸어도 걸어도> 인트로의 할아버지의 산책처럼 뮤지엄 주변 풍경과 다양한 재료들과 내 자신을 하나인 것처럼 상상하며 걸어보자.


좋은 산책이란. 예술을 체험하는 시간이란, 잠자던 감각의 체험이 풍부하게 일어나는 시간이다. 도시에선 결코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것들, 삶에 배경으로 바탕으로 존재했지만 잊고 있었던, 우리가 중요하다고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만나는 시간이다.  뮤지엄 산엔 계절과 풀, 나무, 꽃, 물, 하늘, 돌, 콘크리트, 철, 빛, 그림자, 공간, 날씨.....그리고 사람이 있다. 나의 삶을 이루고 세상을 이루는 것들에 대해 애쓰지 않고도 편하게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창작이고 그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말했다. 꽤 걸어본 분들은 이미 아는 사실이겠지만 ‘걸어도 걸어도’ 인생은 매사 원하는 데로 되지는 않는다. 늘 이런 식이다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고 한발씩 늦고. 그 시간이 지나면 되돌릴 수는 없이,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뮤지엄 산을 통해 그런 시간들을 공간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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